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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1월 3일 충청남도 아산군(牙山郡) 송악면(松岳面) 거산리(巨山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공주(公州) 지역의 만세운동을 계획하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1919년 2월 28일 고종의 국장을 참례하기 위해 상경하여 서울의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고향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고향인 아산 송악 거산리로 돌아가지 않고 같은 해 3월 10일경 공주로 내려와 영명학교(永明學校) 조수인 김수철(金洙喆)의 집에 머물렀다. 김수철 집을 찾아온 영명학교 재학생 안기상(安期商)과 졸업생 신의득(申義得)에게 “경성, 기타 각 지방에서는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조선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데, 공주의 학생들은 어째서 그 운동을 하지 않는가”라고 책망하였다. 신의득이 “공주에서는 영명학교 학생이 15명 정도밖에 있지 않기 때문에 운동이 가능하지 않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공주에서는 농업학교도 있고, 보통학교도 있어 3, 4개 학교가 있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 되지 않느냐? 경성에서는 여학생들까지도 열심히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 공주의 남자는 패기가 없는 놈이 많다”라며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권유하였다.또한 독립가를 전파시키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안기상이 “무슨 노래냐?”라고 묻자, “최근 경성 지방에서 빈번하게 유행하는 독립가이다. 이를 각 곳에 퍼트릴 필요가 있다”라며 ‘조선의 독립을 찬칭(讚稱)’하는 ‘조선독립가’를 가르쳐 주며 유행시킬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버선 사이에서 독립가를 적은 종이를 꺼내어 안기상이 가지고 있던 그림엽서에 독립가를 적어 주었고, 신의득에게 시계 수선 보관증에 다시 베껴 쓰도록 하여 독립가를 공주에 유행시키도록 하면서 이들이 독립 의식을 갖게 하였다.이후 3월 24일 오후 9시경 영명학교 교실에서 목사 현석칠(玄錫七)과 안창호(安昌鎬), 영명학교 교사 김관회(金寬會)와 현언동(玄彦東), 영명여학교 교사 이규상(李圭商), 도쿄(東京) 유학생 오익표(吳翼杓)와 안성호(安聖鎬) 그리고 김사현(金士賢) 등 9명과 회합을 갖고 1919년 4월 1일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김관회의 지시에 따라 김수철 주도로 영명학교 학생과 졸업생을 중심으로 독립선언서 인쇄, 태극기 제작, 참여자 권유 활동 등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4월 1일 오후 2시경 공주 시장 일대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이로 인해 공주경찰서에 붙잡혀 갖은 고문과 조사를 받고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4월 1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고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취소를 받았으나 형량은 징역 1년 6월이 유지되어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다. 고등법원에서 “조선은 건국 이래 4,200여 년의 역사와 2,000만 국민이 있다. 그런데 당대에 이르러 선조의 유전(遺傳)을 하루아침에 상실하고, 10년간의 노예적 생활을 하기에 이르렀음은 천지에 부끄러움은 물론 땅속으로 돌아가는 날 선조에 대한 면목도 없다”라며 “20세기 문명 아래에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고 자유적 민족을 이루려고 행동을 취함은 인류의 본무(本務)이고 또 국가에 대한 의무이다. 조선 민족은 일본국을 배각(排却)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독립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민족이 국가를 다시 성립시키기 위해 우리 민족의 발달을 도모함은 천하 인류 사회의 문운(文運)에 공헌하는 것”이며 “만약 이것을 죄하고자 하면 조선인의 최후의 한 사람까지 죄를 받아야 할 것이다. 2,000만 민족은 하늘을 우러러 목놓아 우는 것 밖에 없다”라며 무죄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고등법원이 상고를 기각하여 최종적으로 징역 1년 6월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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