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사립 창영학교(昌永學校) 교사인 엄창섭(嚴昌燮)은 1919년 3월 5일 군산 영명학교(永明學校) 학생인 강금옥(姜金玉)으로부터 만세운동을 주도할 것을 권유받았다. 이에 찬동한 엄창섭은 3월 6·7일경 자신이 거주하는 창영학교 안에서 고상준(高相俊)·추병갑(秋炳甲) 등과 만나 3월 10일 충남 논산군(論山郡) 강경(江景)의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시위군중에게 배부해 줄 태극기를 제작하기로 하고, 3월 8일 강경읍에서 한지(韓紙) 60매와 물감 등을 구입하여 학교에 모였다. 그러나 제작이 여의치 않자 이튿날 김종갑(金鍾甲)과 추성배(秋聖培)를 학교로 불러 만세운동 동참과 태극기 제작 협조를 요청하여 10일 아침까지 200여 매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3월 10일, 서삼종은 엄창섭에게 부탁을 받아 가마니에 넣어 둔 태극기를 옥녀봉(玉女峰)으로 운반하였다. 이날 오후 3시경 시위군중이 옥녀봉으로 집결하자, 그는 태극기를 꺼내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고 군중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강경 장터로 행진하였다. 이곳에서도 그는 군중들과 ‘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들고 태극기를 흔들며 읍내로 행진하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6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권 1168∼1170면
- 判決文(公州地方法院, 1919. 4. 14)
- 判決文(京城覆審法源, 1919. 6. 7)
- 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