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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광양군(光陽郡, 현재 광양시) 인덕면(仁德面, 현재 광양읍) 인서리(仁西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정기(金正基)를 썼다. 부친은 참봉(參奉) 김찬주(金贊柱)이다. 광양보통학교(光陽普通學校, 현 광양서초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19년 만세운동에 참가하였을 당시 학생이었다.1919년 3월 3일, 천도교 조직을 통해 순천군(順天郡)을 거쳐 광양군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고, 지역 인사들 사이에 운동에 관한 움직임이 있었다. 가장 먼저 3월 27일 광양읍 장날에 옥룡면(玉龍面)의 유생 정성련(鄭星鍊)이 주도한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으나 정성련이 일본 헌병에게 붙잡히고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만세시위가 무산되자 광양군 인사들은 다음 장날인 4월 1일에도 만세시위를 일으킬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당시 학생으로 만세시위에 동참하고자 3월 29일 오전 자택에서 종이 조각을 이용하여 구한국 국기 3장을 만들었다. 이후 오전 11시에 인동리(仁東里) 이재갑(李在甲)의 집에서 인서리의 학생 박용수(朴瑢洙), 인동리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김석용(金錫瑢)에게 자신이 제작한 국기를 보여주면서 4월 1일 광양읍내 장날을 계기로 제2차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제안하여, 그들의 찬성을 얻었다. 이 자리에서 박용수는 국기 가운데에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회복 호창억만세(大韓獨立恢復, 呼唱億萬歲)’라는 글자를 적어 넣었다. 또 이들은 독립만세시위를 4월 1일에 하니 뜻있는 사람은 성(城) 내로 올 것과 오지 않는 자는 집에 불을 지르겠다는 내용과, 본 군민 및 광양 유지 청년은 동참하라는 내용을 기재한 문건 11장을 작성하였다. 또한 모임 장소에 있던 김태훈(金泰勳)과 김태성(金太星), 김행진(金行鎭), 박용완(朴用完)에게 국기와 문건을 보이며, 전국 각지에 독립운동이 크게 일어나는데 우리도 뜻을 같이하여 4월 1일 광양읍내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불러 민중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키자는 내용의 말을 전하고, 각 문건을 나누어 주며 광양읍내 주요 장소에 붙이도록 하였다.그러나 3월 27일의 장날시위 이후 시위 재발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던 일본 경찰에 의해 계획이 발각되어 붙잡혔고, 국기와 문건도 압수당하였다.이후 재판에 회부되어 1919년 5월 10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 해 6월 1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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