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전남 영광(靈光) 사람이다.
1919년 3월 10일, 14일 영광읍내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영광읍내의 노동조합장이던 그는 서울의 만세시위운동 상황을 접하자 보통학교 선생 이병영(李秉英)·박태엽(朴泰燁) 등을 만나 영광에서도 시위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정하고 준비에 착수하였다.
그러던 중 읍내 유지인 이좌근(李佐根) 등이 별도의 시위계획을 추진중인 사실을 알고 협의하여 3월 10일 읍내 장날에 연대 시위를 하기로 하고 그 준비에 들어갔다. 유일·박병문(朴炳文) 등은 태극기를 준비하고, 9일 밤에는 태극기가 일부 나눠지기도 하였다.
거사 당일, 3월 10일 정오경 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 유일이 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철현이 연설한 다음, 정인영의 선창으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많은 군중들이 호응하여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벌였다.
그후 정인영은 3월 15일 김은환(金 煥)·조희방(曺喜芳)·조병현·박병문·박정순(朴正淳) 등과 영광면 남천리(南川里) 박정환(朴靖煥)의 직포공장에서 회합하여 대한독립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약속하고 거사 준비에 들어갔다.
동일 오후 1시 이들은 준비한 태극기 수십 개를 공장 앞에서 수백 명의 군중들에게 유포하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자 이에 군중들이 호응하였다. 이들은 남천리·도동리(道東里)·백학리(白鶴里)·무로리(武盧里) 등을 거쳐 영광경찰서 앞으로 행진하며 시위 운동을 벌였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이해 8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1919. 8. 7. 大邱覆審法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601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