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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4378
성명
한자 南勝淳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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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9 훈격 건국포장
1919. 3. 19 경북(慶北) 의성군(義城郡)에서 장남 남규우(南圭佑)로 하여금 독립만세 시위 운동(獨立萬歲示威運動)을 할 것을 권유하여 남규우(南圭佑)동일(同日)밤에 동군(同郡) 점곡면(點谷面) 사촌동(沙村洞)에서 윤암동민(尹岩洞民)과 함께 독립만세(獨立萬歲)고창(高唱)하였으며 이로 인해 피체(被逮)되어 징역 6월에 집행유예(執行猶豫) 2년을 받고 4개월(個月) 이상(以上)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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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 경북 의성군(義城郡) 점곡면(點谷面) 윤암동(尹岩洞)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점곡면의 독립만세운동은 사촌동(沙村洞)에 사는 김태호(金太鎬)가 김태호(金台鎬)·김학배(金鶴培) 등과 더불어 송내동(松內洞)·서변동(西邊洞)·윤암동 등 점곡면 각지 기독교인을 비롯한 애국인사들과 연락을 취하며 전개되었다.

3월 18일 오후 9시, 사촌동에서는 김태호의 주도로 6∼700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오후 11시경에는 서변동 시장으로 달려가 이곳 권승헌(權承獻)과 더불어 만세시위를 벌였다.

3월 19일 이곳의 만세시위는 확산되었다. 윤암동의 남승순은 당시 62세의 고령이었으나 장남 남규우(南圭佑)로 하여금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종용하였다. 그리하여 남규우는 이날 오후 5시 황금종(黃金鍾)과 같이 부락민을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독립만세운동에 찬동한 23명의 마을주민들이 모여들었다. 남규우는 시위군중과 함께 평암동(平岩洞)을 출발하여 사촌동(沙村洞)으로 몰려갔다. 그곳에는 이날 오전 9시 김태호 등이 주도한 시위군중 300여 명이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한 뒤, 점곡주재소로 행진하였다. 군중들은 주재소를 포위하고 또 일부는 구내로 들어가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시위를 전개한 후 해산하였다.

독립만세 시위는 밤에도 계속되었다. 오후 9시, 타종(打鐘)을 신호로 사촌동·송내동·동변동·윤암동 등 부근 6∼700여 명이 사촌동 앞 도로에 모여 대한 독립만세를 고창한 뒤, 점곡 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이들은 주재소를 포위하고, 다음날 20일 새벽 1시까지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일본 군경의 발포로 부득이 해산해야만 했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8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1919. 8. 13. 大邱覆審法院)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남승순 - 경상북도 의성(義城) 점곡면 만세시위
본문
1857년 2월 8일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점곡면(點谷面) 윤암동(尹岩洞, 현 점곡면 윤암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점곡면의 만세시위는 의성군 내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영향을 받아 촉발되었다. 점곡면에서는 3월 15일에 일어난 안평면(安平面) 대사동(大司洞)의 만세운동 직후부터 송내동교회 조사(助事) 권수백(權秀伯)을 중심으로 만세시위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점곡면과 이웃한 의성면(義城面)에서 3월 18일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 소식에 김태호(金太鎬)는 동지를 규합해 당일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그날 밤 9시경 점곡면 사촌동(沙村洞) 앞길에 모인 30~40명의 주민들은 김태호의 선창을 시작으로 만세시위를 벌이다가 밤 11시경에 자진 해산하였다.3월 19일에는 아침부터 200여 명의 주민들이 사촌동 앞길에 모여들었다. 김태호 등의 주도하에 시위대는 점곡경찰관주재소로 몰려가 주재소를 포위하고 진입을 시도하다가 점심때쯤 흩어졌다. 이 소식을 듣고 같은 날 오후 4시에 장남 남규우(南圭佑)와 함께 “점곡면 사촌동의 김씨 양반이 조선독립운동을 일으켰으니 우리 남씨 양반이 조용히 있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면서 윤암동(尹岩洞) 주민 20여 명을 모아 사촌동으로 향하였다.3월 19일 밤 9시경 사촌동 거리에는 사촌동·서변동(西邊洞)·윤암동·송내동(松內洞) 등의 주민 500여 명이 모였다. 이들은 만세를 부르며 주재소로 몰려갔고 주위를 돌면서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3월 20일 새벽 1시경 일본 경찰의 위협 발포로 해산하였다.만세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후 신문과정에서 “시위운동을 한 목적은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919년 7월 5일 대구지방법원 의성지청에서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여 같은 해 8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고 풀려났다.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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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징역 1년 대구지방법원 1919-07-05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징역 6월(원판결 취소) 집행유예 2년 대구복심법원 1919-08-13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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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북도 의성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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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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