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 경북 의성군(義城郡) 점곡면(點谷面) 윤암동(尹岩洞)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점곡면의 독립만세운동은 사촌동(沙村洞)에 사는 김태호(金太鎬)가 김태호(金台鎬)·김학배(金鶴培) 등과 더불어 송내동(松內洞)·서변동(西邊洞)·윤암동 등 점곡면 각지 기독교인을 비롯한 애국인사들과 연락을 취하며 전개되었다.
3월 18일 오후 9시, 사촌동에서는 김태호의 주도로 6∼700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오후 11시경에는 서변동 시장으로 달려가 이곳 권승헌(權承獻)과 더불어 만세시위를 벌였다.
3월 19일 이곳의 만세시위는 확산되었다. 윤암동의 남승순은 당시 62세의 고령이었으나 장남 남규우(南圭佑)로 하여금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종용하였다. 그리하여 남규우는 이날 오후 5시 황금종(黃金鍾)과 같이 부락민을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독립만세운동에 찬동한 23명의 마을주민들이 모여들었다. 남규우는 시위군중과 함께 평암동(平岩洞)을 출발하여 사촌동(沙村洞)으로 몰려갔다. 그곳에는 이날 오전 9시 김태호 등이 주도한 시위군중 300여 명이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한 뒤, 점곡주재소로 행진하였다. 군중들은 주재소를 포위하고 또 일부는 구내로 들어가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시위를 전개한 후 해산하였다.
독립만세 시위는 밤에도 계속되었다. 오후 9시, 타종(打鐘)을 신호로 사촌동·송내동·동변동·윤암동 등 부근 6∼700여 명이 사촌동 앞 도로에 모여 대한 독립만세를 고창한 뒤, 점곡 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이들은 주재소를 포위하고, 다음날 20일 새벽 1시까지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일본 군경의 발포로 부득이 해산해야만 했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8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1919. 8. 13. 大邱覆審法院)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