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남도 울산(蔚山) 사람이다.
1919년 4월 4일과 5일에 걸쳐 울산군 하상면 병영리(下廂面兵營里)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청년회원들인 이현우(李鉉禹)·이종욱(李鍾旭)·이문조(李文祚)·박영하(朴永夏)·양석룡(楊錫龍)·김장수(金長壽) 등은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박영하와 이종근의 집에서 몇차례 만나 회의를 거듭한 끝에, 4월 4일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그는 4월 3일 이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찬성하여 박영하의 집에서 이문조·이종필(李鍾弼)·최현구(崔鉉久) 등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기를 제작하였으며, 다른 주동자들은 권작지(權作支)의 집에서 태극기를 제작하고 카본 복사지로 2백여매의 독립선언서도 만들었다.
4월 4일 오전 9시경, 그는 다른 청년회 회원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일신학교(日新學校, 현재 兵營國民學校) 교정으로 나아갔다.
그는 일신학교 학생들도 합세케 한 후, 오전 11시 40분경, 양석룡이 축구공을 하늘 높이 차올리는 것을 신호로 일제히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서리(西里)·동리(東里)·남외리(南外里)·산전리(山田里) 일대를 두 번에 걸쳐 시위행진하였다.
이 광경을 본 성내의 시민들이 합세하여 시위군중은 수백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이곳 주재소의 응원 요청을 받은 울산경찰서장 이하 8명의 경찰과 일본군 수비대 5명이 출동하여 무력을 행사하며 해산시키려 하였다.
이에 격노한 시위군중은 이들과 육박전을 벌였으나, 양석룡·이종욱·이종룡(李鍾龍) 등 14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어 울산경찰서로 압송되는 바람에 더 이상 만세시위를 전개하지 못하고 일단 해산하였다.
그는 이날 저녁 곽남부락(郭南部落)의 김세진(金世鎭)의 집으로 피신한 이문조·이종필과 문성초(文星超)·윤학이(尹學伊)·백봉근(白鳳根)·최현구와 연락을 취하며 다음날의 재거사를 계획하였다.
이튿날 오후 3시경, 그는 수천명의 시위군중과 주재소 앞에서 모여 다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이때 울산으로부터 13명의 일본 군경이 응원 출동하여 이문조 등 9명의 주동자를 검거하였다.
이에 격노한 시위 군중은 이들에게 대들며 육탄전을 벌였다.
이때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군 수비군이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시위대열은 해산하였다.
이후 그는 일제의 검속으로 체포되어, 이해 4월 23일 부산(釜山)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살인 등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7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206·208면
- 판결문(1919. 4. 23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