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경남 울산(蔚山) 사람이다.
1919년 4월 4일부터 6일까지 전개된 울산군 하상면(下廂面) 병영리(兵營里)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울산 병영에서는 청년회 간부인 양석룡(楊錫龍)과 이현우(李鉉禹) 등이 중심이 되어 동지 규합과 준비에 착수하여 4월 4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이 달 3일 서리(西里)의 박영하(朴永夏)와 권작지(權作支)의 집에서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이튿날의 거사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4월 4일 오전 9시경, 청년회 회원들로 주축을 이룬 독립만세 시위군중은 병영보통학교에 모여 태극기를 꺼내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인근의 서리·동리(東里)·남외리(南外里)·산전리(山田里) 등을 행진하며 시위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 경찰의 무력행사로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다음날인 4월 5일 오후 3시경, 군중들은 다시 병영보통학교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인근지역을 행진하면서 경찰주재소로 향하였다. 이때 시위군중은 1천여 명에 이르렀고, 사태의 절박함을 느낀 일본 관헌은 급히 울산으로부터 13명의 군경을 증원 받아 시위군중과 공방전을 벌였다.
4월 6일에는 병영청년회 간부들과 윤학이, 김송근(金松根), 백봉근(白鳳根) 등이 협력하여 전날보다 더 큰 기세로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행진하였다. 이때 윤학이도 일본 군경에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22일 울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3·1運動實錄(이용락, 1969) 627∼630面
- 釜山·慶南三一運動史(三·一同志會, 1979) 851∼852面
- 삼일충혼비(병영삼일사 재건기성회, 1967)
- 受刑人名票廢棄目錄(울산광역시 중구청장,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