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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8
성명
한자 文星超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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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국장
평소 민족주의가 투철하고 지역사회에서 신망이 있는 분으로 1919. 4. 5 울산병영 3. 1 운동사건을 주동하여 시위를 지휘중 일본군 수비병의 난폭한 총탄에 의하여 순국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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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남도 울산(蔚山) 사람이다.

울산군 하상면(下廂面) 병영리(兵營里)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그는 이곳의 비밀 청년회에 가입하여 조국광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던 중, 1919년 3월 서울에서 귀향한 한명조(韓命祚)와 이영호(李永浩)로부터 전국적으로 퍼지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4월 4일을 기하여 고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약속하고 자기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희사하였다. 이달 3일 서리(西里)의 박영하(朴永夏)와 권작지(權作支)의 집에서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이튿날의 거사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4월 4일 오전 9시경, 청년회 회원들로 주축을 이룬 독립만세 시위군중은 병영국민학교에 모여 태극기를 꺼내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인근의 서리·동리(東里)·남외리(南外里)·산전리(山田里) 등을 행진하며 시위운동을 벌였으나, 출동한 일본 경찰의 무력행사로 여러 사람이 검거된 후 해산하였다. 이에 그는 이문조(李文祚)·이종필(李鍾弼) 등의 동지와 함께 김세진(金世鎭)의 집으로 피신하여, 이튿날 다시 거사하기로 계획하고 다른 동지들에게 연락하였다.

4월 5일 오후 3시경, 다시 병영국민학교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인근지역을 행진하다가 일제의 경찰주재소로 향하였다. 이때 독립만세 시위군중이 1천여명에 이르러서, 사태의 절박함을 느낀 일본 관헌은 급히 울산으로부터 13명의 군경을 증원 받아 시위군중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결국 이문조 등 9명이 일본 군경에 의해 체포되자, 그는 군중의 선두에 서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에 투석하였다. 이에 일본 군경은 시위군중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해 선두에 있던 다른 3명의 동지와 함께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206, 207, 208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74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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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문성초 호 : 청록(靑鹿) 경남 울산(蔚山) 울산군 하상면 만세운동
본문
1887년 12월 30일 경상남도 울산군(蔚山郡) 하상면(下廂面) 서리(西里, 현 울산광역시 중구 서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남평(南坪)이고, 호는 청록(靑鹿)이다. 1919년 4월 만세운동 당시 비밀결사인 병영청년회의 회원으로, 병영리(兵營里)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다.1919년 봄 서울에서 유학하던 병영청년회원들이 귀향하여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소식을 병영청년회에 전하였다. 이에 청년회 회원들과 논의하여 4월 4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지역 사회에서 신망이 있었으므로 자기 재산을 독립운동 준비를 위한 자금으로 희사하였다. 4월 3일 동지들과 함께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며 거사에 대비한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거사일인 1919년 4월 4일 오전 9시 청년회원들과 함께 병영리에 위치한 사립일신학교(私立日新學校, 현 병영초등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교정에 집결하였다. 오전 11시 40분 축구공을 높이 차 올리는 신호에 모여든 시위 군중은 모두 준비한 태극기를 꺼내들고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힘껏 외쳤다. 이어 인근의 서리·동리(東里)·남외리(南外里)·산전리(山田里)를 돌면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그러나 울산에서 지원 요청을 받고 출동한 일제 경찰과 일본군 수비대는 무력으로 주도 인물들을 검거하며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일제 군경의 검거를 피한 후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여 이튿날 사립 일신학교에서 다시 거사하기로 계획하였다.4월 5일 오후 3시 일신학교에 다시 집결한 시위 군중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시가지를 따라 하상경찰관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시위 군중이 1,000여 명으로 늘어나자 급히 지원에 나선 울산의 일제 군경이 무력으로 진압하며 시위대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시위 군중 다수가 부상을 입고 동지들이 붙잡혀 가자, 선두에 서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하상경찰주재소에 돌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일제 군경이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고, 엄준(嚴俊)·주사문(周士文)·김응룡(金應龍) 3명과 함께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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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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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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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삼일 충혼비 울산광역시 중구
2 사당 삼일사 울산광역시 중구
3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4 조형물 병영 3·1운동 기념 조형물 울산광역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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