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0970
성명
한자 金長壽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5 훈격 애족장
1919. 4. 4-5 양일간 경남(慶南) 울산군(蔚山郡) 하상면(下廂面) 병영리(兵營里)에서 병영(兵營) 청년회 간부 이현우(李鉉禹), 이문조(李文祚) 등과 함께 만세시위 운동을 계획하고 병영(兵營) 일신학교(日新學校) 학생들과 합세하여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큰 길을 지나 주재소로시위행진을 벌이는 등 활동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경남 울산(蔚山)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4, 5 양일간 경북 울산군 하상면(下廂面) 병영리(兵營里)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병영리는 조선시대에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慶常左道兵馬節度使營)이 있던 곳으로 이곳의 청년들은 애국적 상무정신(尙武精神)이 강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성장한 김장수는 일찍부터 항일의식을 길러 오면서 비밀결사 병영청년회(兵營靑年會)를 통하여 독립운동의 방도를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서울 유학생 한명조(韓命祚)·이영호(李永浩) 등이 3·1운동의 소식을 전해 오자 만세운동의 계획을 세워 나갔다. 이 때 그는 병영청년회 간부 이현우(李鉉禹)·이문조(李文祚)·이종욱(李鐘旭)·박영하(朴永夏) 등과 수차에 걸쳐 협의를 거치며 4월 4일로 거사일을 정하고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4월 3일에는 독립선언서 2백여 매를 작성하였고, 태극기 5백여 개를 제작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종이와 명주에 '구대한국독립만세(舊大韓國獨立萬歲)'·'독립만세'라고 대서특필한 깃발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거사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심동체의 혈맹(血盟)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결의 아래 오른손 가운데손가락을 깨물어 '결사보국(決死報國)'의 네 글자를 혈서로 서명하였다.

거사일인 4월 4일 오전 9시경에 그는 청년회원들과 함께 병영일신학교(兵營日新學校) 교정으로 집결하여 학생들을 동원한 뒤 오전 11시 40분경에 축구공을 높게 차올리는 것을 신호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준비해 간 태극기와 깃발을 앞세우며 만세시위를 거행하였다. 수백 명의 시위대는 면내 각 동리를 진군하다가 일경의 탄압에 의해 주동 인물 몇몇이 붙잡히는 바람에 일단 해산하였다.

일경의 검거망을 피한 김장수를 비롯한 청년회 간부들은 4월 4일 저녁에 모여 다음날에 만세시위를 재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4월 5일 오후 3시를 기해 김장수 등은 일신학교에 집결하여 만세시위를 시작하면서 1천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주재소를 에워싸고 전날에 검거한 주동인물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 때 울산에서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가 무차별 사격을 가함으로써 시위대 중 문성초(文星超) 등 4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다수가 총상을 입었다. 이로써 만세시위는 해산되었고, 김장수는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24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205면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74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장수 - 경상남도 울산(蔚山) 울산군 하상면 만세운동
본문
1887년 5월 20일에 경상남도 울산군(蔚山郡) 하상면(下廂面) 동리(東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 이며, 호는 유암(裕岩)이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다가, 그 해 4월 4, 5일 하상면 병영리(兵營里)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병영리는 조선시대에 경상좌도(慶尙左道) 병마절도사영 (兵馬節度使營)이 있던 곳으로 청년들의 애국적 상무정신이 강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영향을 받고 성장하여 일찍부터 항일의식을 지니고 비밀결사 병영청년회(兵營靑年會) 간부로 활동하였다. 병영리에는 1906년 사립 일신학교(日新學校)가 설립되었는데 이 학교 출신 청년들이 병영청년회의 주요 회원이었고, 대부분 농업을 주업으로 하고 있었다.1919년 3월 서울에서 유학하던 지역 청년들은 병영청년회 간부에게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였다. 이를 전해 듣고 이현우(李鉉禹)·이문조(李文祚)·이종욱(李鍾旭)·박영하(朴永夏)·이종근(李鐘根)·양석룡(楊錫龍) 등과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논의하여4월 4일을 거사일을 정하였다. 이들은 거사의 철저한 결행을 위해 오른쪽 가운데 손가락을 깨물어 ‘결사보국(決死報國)’이라는 혈서를 함께 썼다.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와 ‘구대한국독립만세(舊大韓國獨立萬歲)’, ‘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깃발을 만들었다.거사일인 4월 4일 오전 9시경 청년회 회원과 일신학교 학생들이 일신학교 교정으로 집결하였다. 축구 경기를 위장하여 모인 이들은 경기 시작을 알리기 위해 축구공을 높이 차올리는 것을 신호로 준비한 태극기를 꺼내들고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거행하였다.시위대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서리(西里)·동리(東里)·남외리(南外里)·산전리(山田里)를 돌면서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에 지역 주민들이 합세하여 시위 군중이 수백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의 기세에 놀란 병영경찰주재소의 요청으로 울산 경찰과 일본군 수비대가 급히 달려와 주도 인물을 검거하며 총검으로 진압하여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몸을 피하여 이날 저녁 청년회 간부들과 함께 이튿날 다시 거사하기로 계획하고 다른 동지들에게 연락하였다.1919년 4월 5일 이른 아침 동지들과 만나 지역 주민들을 규합하고 오후 3시를 기해 일신학교에 모여 다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인근 지역을 행진하자 군중은 1,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 군중과 함께 하상면의 경찰관 주재소를 에워싸고 전날에 검거한 주도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이때 울산에서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가 무차별 사격을 가함으로써 4명이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4월 24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출옥 후에는 동지들과 함께 기미계(己未契)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결의하고 해마다 사망자의 추모제를 비밀리에 거행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산골 유골을 화장하여 산이나 강, 바다 등에 흩뿌려 묘소를 특정하기 어려운 경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삼일 충혼비 울산광역시 중구
2 사당 삼일사 울산광역시 중구
3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4 조형물 병영 3·1운동 기념 조형물 울산광역시 중구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김장수(관리번호:30970)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