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경남 울산(蔚山)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4, 5 양일간 경남 울산군 하상면(下廂面) 병영리(兵營里)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병영리는 조선시대에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慶尙左道兵馬節度使營)이 있던 곳으로 이곳의 청년들은 애국적 상무정신(尙武精神)이 강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성장한 이문조는 일찍부터 항일의식을 길러 오면서 비밀결사 병영청년회(兵營靑年會)를 통하여 독립운동의 방도를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서울 유학생 한명조(韓命祚)·이영호(李永浩) 등이 3·1운동의 소식을 전해오자 만세운동의 계획을 세워 나갔다. 이 때 그는 병영청년회 간부 이현우(李鉉禹)·이종욱(李鐘旭)·박영하(朴永夏) 등과 수차에 걸쳐 협의를 거치며 4월 4일로 거사일을 정하고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4월 3일에는 독립선언서 2백여 매를 작성하였고, 태극기 5백여 개를 제작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종이와 명주에 '구대한국독립만세(舊大韓國獨立萬歲)'·'독립만세'라고 대서특필한 깃발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거사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심동체의 혈맹(血盟)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결의아래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을 깨물어 '결사보국(決死報國)'의 네글자를 혈서로 서명하였다.
거사일인 4월 4일 오전 9시경에 그는 청년회원들과 함께 병영일신학교(兵營日新學校) 교정으로 집결하여 학생들을 동원한 뒤 오전 11시 40분경에 축구공을 높게 차올리는 것을 신호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준비해 간 태극기와 깃발을 앞세우며 만세시위를 거행하였다. 수백 명의 시위대는 면내 각 동리를 진군하다가 일경의 탄압에 의해 주동 인물 몇몇이 붙잡히는 바람에 일단 해산하였다.
이 때 일경의 검거망을 피한 이문조 등 청년회 간부들은 4월 4일 저녁에 모여 다음날에 만세시위를 재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4월 5일 오후 3시를 기해 이문조 등은 일신학교에 집결하여 만세시위를 시작하면서 1천여 명의 군중들이 가세하였다. 이 때 이문조는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들고 시위행렬을 선도하였다. 그리고 시위대의 만세분위기는 한껏 고조되면서 군중들이 주재소를 에워싸고 전날에 검거한 주동인물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 때 울산에서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가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가운데 주동 인물들을 체포하였는데 이 때 이문조는 일경에 붙잡히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위군중들은 더욱 격렬하게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수비대의 총격에 의해 문성초(文星超)등 4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다수가 총상을 입는 피해를 입고 해산하였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5월 2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20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1214·1215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33면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7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