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경남 양산(梁山) 사람이다.
1919년 당시 양산군 하북면 지산리(下北面 芝山里) 출신의 승려(僧侶)로 서울 중앙학림(中央學林) 학생이었다.
그는 1919년 2월 29일 서울에서 민족대표의 한사람인 한용운(韓龍雲)으로부터 독립선언문 3,000매를 받아 3월 1일 탑동(塔洞)공원에서 시민에게 배포한 후 군중을 규합하여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날 밤에도 학생동지들과 같이 청진동(淸進洞) 일대의 주민들에게 독립선언문 200여 매를 배포하였으며 3월 7일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이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형을 선고받아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豫審終結決定書(1919. 8. 30 京城地方法院)
- 判決文(1919. 11. 6 京城地方法院)
- 判決文(1920. 2. 27 京城覆審法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