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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4593
성명
한자 朴萬守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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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2002 훈격 대통령표창
1919년 3월 12일 윤세주(尹世冑) 등과 경남(慶南) 밀양(密陽)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협의하고 다음날 밀양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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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경남 밀양(密陽) 사람이다.

1919년 3월 13일 밀양 장날에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밀양 장날의 만세운동은 윤세주(尹世胄)·윤치형(尹致衡) 등이 광무황제(光武皇帝) 인산(因山)에 참례하였다가,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와 이 사실을 동화학교(同和學校) 교장 전홍표(全鴻杓)에게 전하면서 추진되었다.

전홍표는 밀양지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을 쏟았으므로 많은 청년들이 그를 따랐다. 그리하여 3월 12일 밤 박만수는 윤세주·윤보은(尹輔殷)·정동찬(鄭銅燦)·김소지(金小池)·박소종(朴小宗) 등과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의논하고 윤세주 집을 거점으로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들은 3월 13일 밀양 읍내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를 밀양면사무소와 부북면(府北面)사무소 등지에서 등사판을 몰래 가져와 위북산(偉北山)에서 밤을 새워 수백 매를 인쇄하는 한편, 수백 장의 태극기도 제작하였다.

거사 당일 오후 1시 30분경, 박만수 등은 윤세주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미리 준비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때 장터에는 수천의 군중이 운집하여 함께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행진을 벌였다.

밀양거리는 온통 만세군중의 시위로 수라장이 되었고, 부산에서 출동한 일본헌벙과 수비대는 주모자 체포에 무자비한 행동을 가하였다. 그러던 중에도 다음날인 3월 14일에는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 160여 명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뛰쳐나와 행진하였고, 거리의 주민들도 이에 호응하였다.

결국 군경의 탄압으로 시위대열은 해산되고 박만수 등의 주모자는 일본 헌병에 의해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부산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釜山·慶南三一運動史(三·一同志會, 1979) 212面
  • 判決文(釜山地方法院, 1919. 4. 14)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만수 - 경남 밀양(密陽) -
본문
1897년 2월 2일 경상남도 밀양군(密陽郡) 밀양면(密陽面) 내이동(內二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밀양군 읍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밀양군 읍내 만세시위는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돌아온 윤세주(尹世胄)·윤치형(尹致衡) 등이 읍내 학생과 기독교인을 규합하면서 준비되었다. 1919년 3월 11일과 12일 이틀간 내이동 정동찬(丁銅燦) 집에서 윤세주를 중심으로 시위를 준비하는 모임이 열렸는데, 이날 이장수李(章守)·김소지(金小池)·박소종(朴小宗) 등과 함께 참석해 만세시위에 동참하기로 결의하였다. 거사일은 밀양군 읍내 장날인 3월 13일로 정하였다.거사일인 1919년 3월 13일 오후 1시경, 동지들과 함께 밀양면 내일동 김병환金(鉼煥) 상점 인근에 모였는데, 윤치형으로부터 ‘조선독립만세’라 쓴 대형 깃발을 전해 받으며 만세시위의 선두에 설 것을 요청받았다. 이를 흔쾌히 수락하고 깃발을 들고 선두에 서서 앞으로 나갔다. 거사 계획 때부터 함께 한 동지들 중 김소지가 나팔을 불며 그 뒤에 섰고, 박소종 등이 태극기를 흔들며 따랐다.시위대가 시장 인근 밀양공립보통학교(密陽公立普通學校, 현 밀양초등학교) 도로 앞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수천 명의 군중 앞에 선 윤세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선창하자, 주민들과 함께 이에 호응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서 대형 깃발을 들고 시위대의 선두에서 읍내 시장 곳곳을 행진하자, 군중들도 만세를 부르며 뒤를 따랐다.읍내 장터에서 대규모 만세시위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밀양헌병분견소 헌병들이 진압을 위해 출동하였다. 시위대 진압을 위해 부산에서 급파된 헌병과 일본군 수비대까지 출동하였다. 일제 군경은 무자비한 폭력과 총검을 휘두르며 시위대 진압 작전에 나섰고, 결국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만세시위 주도자로 일제에 붙잡혔다.1919년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6월 부산지방법원밀양지청 1919-04-14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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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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