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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497
성명
한자 南景明
이명 南溶熙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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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2 훈격 대통령표창
1919. 3. 13 경남(慶南) 창녕군(昌寧郡) 영산면(靈山面) 남산(南山)에서 23명의 동지와 모여 결사단(決死團)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에서 후퇴하는 자는 생명을 빼앗긴다’는 내용의 맹세서에 서명한 후 3백여 명의 군중을 규합하여 영산읍내(靈山邑內)시위 행진(示威行進)하는 등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피체되어 징역 8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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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0권(1993년 발간)

경남 창녕(昌寧) 사람이다.

1919년 3월 13일 창녕군 영산읍(靈山邑)에 있는 남산(南山)에서 구중회(具中會)·김추은(金秋銀) 등과 함께 비밀리에 결사단(決死團)을 조직하고 독립만세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이들은 '독립운동에서 후퇴하는 자는 생명을 빼앗긴다'는 내용의 맹세서에 각기 서명한 후 700여명의 시위군중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영산읍내를 시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해 5월 1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선고받아 공소하였으나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19. 6. 17. 대구복심법원)
  • 범죄인명부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229∼23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1226∼1229면
  • 판결문(1919. 5. 10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남경명 남용희(南溶熙) 경상남도 창녕(昌寧) 영산면 만세운동
본문
1898년 9월 23일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 영산면(靈山面) 성내리(城內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이명은 남용희(南溶熙)이다. 영산지역 신교육의 모체가 된 사립 경명학교(慶明學校)(영산공립보통학교의 전신)를 졸업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영산면 죽사리(竹紗里)에 거주하며 이발업에 종사하고 있다가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영산면의 만세시위는 구중회(具中會)가 서울에서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전달할 목적으로 고향에 내려오며 시작되었다. 이때 장진수(張振秀)·김추은(金秋銀) 등과 함께 구중서를 만나 만세운동 계획에 적극 찬성하고 참여하였다. 동지들과 함께 거사일을 3월 13일로 정하고, 야간을 이용하여 목판으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큰 깃발을 준비하였다. 또한 각지로 동지들 파견하여 주민들을 규합하였다.1919년 3월 12일 밤 23명의 주도인물들과 함께 구중회의 집에 모여 결사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을 내용으로 하는 선서문과 서약서를 작성하였다. 이어 남산(南山)에서 개춘회(開春會) 명목으로 모여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과 농악대 준비 등 구체적인 활동 방법을 논의하였다.이어 3월 13일 오후 1시, 영산면 남산으로 결사대원과 함께 집결해 「결사단원맹세서(決死團員盟誓書)」에 서명하고 결의를 다졌다. 오후 2시 구중회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결사단원과 함께 농악대를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와 전진가(前進歌)를 부르며 하산하였다. 이어 남산 밑 만년교(萬年橋)에서 일본 경찰이 읍내 진입을 막기 위해 시위 행렬을 저지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이를 돌파하고 농악대를 앞세워 나가자 군중들이 가세하여 영산읍으로 행진하였다. 시위 군중은 600~700명으로 늘어났으며 일부는 주재소를 포위하고 일본인 상점을 습격하기도 하였다.해가 지자 동지들과 함께 시위대를 설득하여 자진 해산하고 다음 날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때 창녕경찰서에서 경찰대를 영산으로 급파해 주도인물인 구중회·장진수·김추은을 붙잡아 창녕경찰서에 수감하였다. 이때 체포를 피한 결사대원과 함께 붙잡힌 동지를 구출하기 위해 저녁 8시 남산에서 재집결하였다.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북과 장구를 치며 하산하자 많은 군중이 모였고, 이들과 함께 영산 읍내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시위대를 이끌고 창녕읍으로 진출을 시도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저지로 실패하였다. 3월 14일 결사대원들과 함께 창녕읍에 잠입해 구속된 결사대원의 석방을 시도하였으나 다른 결사대원과 함께 붙잡혔다.1919년 5월 1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검사가 공소하여, 그 해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8월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출옥 후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早稻)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귀향하여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해방 후 귀국하였다고 전해진다.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8월(원판결 취소) 대구복심법원 1919-06-17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남도 창녕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조형물 영산 3.1 봉화대 경상남도 창녕군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3 비석 영산 3·1독립운동 기념비 경상남도 창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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