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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509
성명
한자 具中會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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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 3. 12경 경남(慶南) 창녕군(昌寧郡) 영산면(靈山面) 동리(東里)에서 장진수(張振秀) 등과 결사대(決死隊)를 조직하고, 동년(同年) 3. 13 영산면(靈山面) 남산(南山)에서 군중 400여명과 같이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다 피포되어 소위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의 옥고를 받았으며 주동자로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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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경남 창녕(昌寧)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천도교인(天道敎人)이었던 그는 천도교 계통으로부터 거사연락을 받고 장진수(張振秀)·김추은(金秋銀)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준비·계획하고, 1919년 3월 13일 창녕군 영산읍(靈山邑)에서 천도교인 23명으로 결사단(決死團)을 조직하였다. 3월 13일 약 400여명의 시위군중을 이끌고 주재소를 포위하고 일인상점을 습격한 그는 출동한 일경(日警)에 의해 붙잡혀 구금되었다. 그 후 대구형무소에서 10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 영문과를 졸업한 후 귀향하여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1938년경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광복후 귀향하였다고 한다. 1946년에서 1948년에 걸쳐 마산중학교 초대 교장으로 재직하였으며, 1948년 창녕지구 초대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2년간 정치활동을 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9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19. 5. 10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구중회 호 : 연파(蓮波) 경상남도 창녕(昌寧) 3.1운동
본문
1898년 4월 21일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 영산면(靈山面) 동리(東里)에서 태어났다. 호는 연파(蓮波)이고, 천도교인으로 활동하였다. 창녕군 영산면의 영산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7년 서울의 사립 보성학교를 졸업하였고, 영산 지역의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동생 구남회(具南會)도 만세 의거를 주도한 ‘23인 결사대’에 참여하였다. 보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인근에 머물다 3.1만세운동 준비단계에서 지방의 동시 호응을 얻으려고 고향에 내려왔다. 먼저 장진수(張振秀)·김추은(金秋銀)의 찬동을 얻은 후 영산 읍내 4개 리를 중심으로 그 주변의 청년을 규합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독립선언문과 독립신문의 전달 책임을 맡아 다시 귀향한 후 청년 동지들과 함께 3월 13일을 거사 일로 정하고 시위 준비를 위하여 자금을 갹출하였다. 7~8명의 청년을 사랑방에 불러 모아 목판으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큰 깃발도 준비하였다. 3월 12일 밤 주동 인물들이 그의 집에 모여 마지막으로 단행할 거사를 숙의하였다. 이때 22명의 청년과 함께 ‘23인 결사대’를 조직하여 선언문과 서약서를 작성하고 투쟁 방법을 결정하였다. 3월 13일 오후 1시경 23인의 결사대원은 창녕군 영산면에 있는 남산(南山)에 집결하여 ‘일보라도 후퇴하는 자는 다른 단원에 의해 생명을 빼앗긴다’라고 맹세하는 결사단원맹세서(決死團員盟誓書)에 서명하고, 오후 2시경 시위를 시작하였다. 운집한 군중 앞에 대표로 나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 시위 대열이 남산에서 내려오자 출동한 일본 경찰이 만년교에서 저지하였으나 이를 뚫고 영산읍으로 행진하였다. 대한 독립 만세와 전진가라는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며 만세 시위를 전개하자 군중은 600~700명으로 늘어났다. 해가 저물자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한 후 다음날을 기약하며 시위대는 자진 해산하였다. 이때 창녕경찰서에서 급파한 일본 경찰에 의해 장진수·김추은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나머지 결사대원들은 구속 동지의 탈환을 위해 저녁 8시경 남산에 재차 집결하였다. 많은 군중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출동한 일제 경찰과 충돌하였으나, 결국 나머지 동지들도 체포되었다. 이해 5월 1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개월 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사범학교 영문과를 1926년 졸업하였다. 귀국 이후 천도교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1927년 4월 천도교청년당 제4회 정기총회에서 중앙포덕대원으로 선출되어 경상남북도 일원을 돌며 천도교리를 전파하였으며, 천도교 신파의 기관지 『신인간』에 각종 글을 게재하였다. 1928년 4월 청년당 제2차 전당대표대회에서 김기전(金起田)·차상찬(車相瓚)·방정환(方正煥) 등과 함께 21명의 중앙집행위원이 된 이래 1932년까지 매년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이후 귀향하여 지내다가 1938년경 만주로 건너가 농장을 경영하고 피난 동포 구제 사업에 종사하였다. 광복 후 귀향하여 미군정청 경남고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밀양군지부 위원장,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 마산중학교 초대 교장 등을 지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북한소재 국립묘지 외 독립유공자가 안치된 단일묘소가 북한지역에 있는 묘소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조형물 영산 3.1 봉화대 경상남도 창녕군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3 비석 영산 3·1독립운동 기념비 경상남도 창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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