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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751
성명
한자 金浩鉉
이명 金洪錄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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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1 훈격 애국장
1919. 4. 3. 경남 창원군 진전(鎭田) 진동(鎭東) 진북(鎭北) 각면(各面)연합(聯合) 독립만세 운동(獨立萬歲運動)계획(計劃)에 따라 집합장소(集合場所)진전면(鎭田面) 양촌리(良村里) 천변(川邊)에 모여 큰 태극기(太極旗)를 앞세우고 8,000여명(餘名)시위 군중(示威群衆)독립만세(獨立萬歲)고창(高唱)하며 시위(示威)할 때 일경(日警)들의 무차별(無差別) 발포(發砲)사살(射殺)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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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남도 창원(昌原)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의 진전면(鎭田面)·진북면(鎭北面)·진동면(鎭東面)의 연합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28일의 진동면 고현리(古縣里)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한 후, 피신했던 변상태(卞相泰)·권영대(權寧大)·권태용(權泰容)등에 의해 계획되었는데, 그들은 이곳의 청년유지 변상섭(卞相攝)·황태익(黃泰益)·김수동(金守東)·김영종(金永鍾)·구수서(具守書)·변상술(卞相述)·변우범(卞又範) 등과 연락을 취하며 4월 3일 인근의 3개면민들을 동원하여 진전면 양촌리(良村里)의 냇가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4월 1일 변상태·황태익 등은 변우범의 집에 모여 회의를 한 후, 동리 서당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여 미리 동리 사람들에게 배부해 주고, 인근지역을 순회하며 민중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이때 이 계획을 전해들은 그는 이에 적극 찬성하여 4월 3일 오전 9시, 수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양촌리 냇가에 집결하였다. 변상섭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변상태가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양촌리 계곡은 온통 태극기의 물결속에 독립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이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주재소가 있는 진동면으로 시위행진을 시작하였다. 이때 그들대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뒤 진전면으로부터 시위행진하여 오는 시위대열을 기다리던 진동면민들도 이에 가세하여 시위군중은 5천여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2시, 시위대열이 진북면 사동리(社洞里) 다리앞에 이르렀을 때, 급보를 받고 출동한 일본 헌병과 보조원 8명 및 재향군인 30여명과 충돌하였다.

일제와 피비린내 나는 육박전이 벌어져 다수의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을 때, 마산(馬山)에서 응원 출동한 일본군 야포대대 군인이 현지의 일본 헌병, 보조원, 재향군인과 합세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이 야만적인 발포로 8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22명이 부상당하였는데, 이때 그도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19·123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7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249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호현 김홍록(金洪錄) 경상남도 창원(昌原) 창원군 만세운동
본문
1893년 12월 15일 경상남도 창원군(昌原郡) 진전면(鎭田面) 곡안리(谷安里, 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곡안리)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홍록(金洪錄)이다. 1919년 4월 3일 창원군의 진전면·진동면(鎭東面)·진북면(鎭北面)이 연합한 이른바 ‘삼진(三鎭)의거’에 참여하였다.삼진의거는 1919년 3월 28일 진동면 고현(高縣)시장 만세운동을 주도한 후 피신하고 있던 변상태(卞相泰)·권영대(權寧大)·권태용(權泰容) 등에 의해 계획되었다. 이들의 계획에 적극 찬동한 인근지역의 청년 유지 변상섭(卞相攝)·황태익(黃泰益)·김수동(金守東)·김영종(金永鍾)·구수서(具守書)·변상술(卞相述)·변우범(卞又範) 등이 지역 주민을 동원하여 4월 3일 진전면 양촌리(良村里) 냇가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이 계획을 전해 듣고 4월 3일 아침 거사 장소인 양촌리 냇가로 나갔다. 인근 지역으로부터 1,500여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9시경 대형 태극기가 세워지고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자 독립만세의 함성이 메아리쳤다.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본군 헌병주재소가 있는 진동면으로 행진을 시작하였다. 도중에 인근 지역 주민이 시위 대열에 합류하여 시위 군중은 5,000여 명으로 늘어났다.4월 3일 오후 2시, 시위대가 진북면 사동리(社洞里) 다리 앞에 이르렀다. 사동교 건너편의 일본 측 저지선에는 일본 헌병 및 헌병 보조원 8명과 현지의 일본 재향군인 30여 명이 포진하고 있었다. 양측 간의 육박전이 벌어졌고, 위급함을 느낀 일본 헌병들이 총격을 가하였다. 이때 시위대열의 앞에 서서 일본 헌병에 맞서다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이 날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8명이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부상자가 다수 발생한 가운데 시위대는 해산하였다.이 날 사망한 김수동(金守東)·변갑섭(卞甲燮)·변상복(卞相福)·김영환(金英煥)·고묘주(高昴柱)·이기봉(李基鳳)·홍두익(洪斗益) 등과 함께 8의사라고 칭해진다. 해방 후인 1946년 지역민들이 사동교 건너 암벽에 창의비를 건립하였고, 1963년 진북면 지산리로 옮겨 세웠다. 1981년 4월 22일 8의사들의 묘를 삼진의거의 진원지였던 양촌리 산자락에 모아 3·1독립만세 순국 8의사 묘역을 조성하고, ‘팔의사지묘(八義士之墓)’라고 새긴 비를 세웠다.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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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합동묘역 8의사 묘역 경상남도 창원시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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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사당 마산시 애국지사 제당 경상남도 창원시
2 비석 창원읍민 만인운동비 경상남도 창원시
3 8의사 창의탑 경상남도 마산시
4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5 비석 삼진 독립의거 기념비 경상남도 창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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