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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728
성명
한자 姜齊馨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 용덕면 면장으로서 면직원을 동원하여 선언문의 등사와 거사의 사전준비를 주도하여 연 4일간의 만세시위를 지휘하다가 피체되어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출옥하였으나 여독으로 3년간에 걸쳐 투병하다 사망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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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남도 의령(宜寧) 사람이다.

1919년 3월 14일의 의령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3일 누이동생 구은득(具銀得)의 문병 차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구여순(具汝淳)과 그의 이종동생 이화경(李華卿)에 의해 계획되었다. 그들은 귀향 즉시 이곳의 청년 유지들인 정용식(鄭容軾)·최정학(崔正學)·이우식(李祐植)·김봉연(金琫淵) 등과 만나 의령읍 장날인 3월 14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당시 용덕면(龍德面) 면장이던 그는 이들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등사해 줄 것을 요청받고 쾌히 승낙한 후, 면서기 전용선(田溶璿)·최병규(崔秉圭) 등에게 면사무소의 기재를 이용하여 수백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도록 지시하였다. 3월 14일 오후 1시, 그는 많은 시위군중과 함께 의령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 3백여명이 가세하였고, 인근의 주민들이 계속 모여들어 시위군중은 점차 3천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러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와 읍내를 시위행진하고 경찰서 앞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외치고 자진 해산하였다. 그는 이튿날 다시 의령향교(宜寧鄕校) 앞에 모인 1천 5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경찰서와 군청을 시위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이화경·이원경(李源卿)·최숙자(崔淑子)·강순이(姜順伊) 등의 주동 하에 여성들도 궐기하였다. 그러나 이때 마산(馬山) 주둔 일본 포병대대에서 응원 출동한 8명의 일본군과 현지의 일본 경찰이 총검을 휘두르며 시위군중을 위협하여 해산시키고,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도 이때 체포되었으며, 진주재판소(晋州裁判所)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른 뒤 출옥하였으나, 일제에게 당한 잔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3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3·1운동실록(이용락) 684·686·68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08·311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강제형 - 경남 의령(宜寧) 의령면 만세시위
본문
1888년 3월 28일 경상남도 의령군(宜寧郡) 용덕면(龍德面) 죽전리(竹田里)에서 태어났다. 용덕면 면장으로 1919년 3월 14일 의령면 장날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날 만세 시위는 의령군 동동(東洞)에 사는 구여순(具汝淳)이 계획하였다. 구여순은 이화경(李華卿)과 같이 3월 3일 서울에서 유학하는 여동생 구은득(具銀得)의 병문안을 갔을 때 만세 시위를 목격하고 4일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의령으로 돌아오면서 추진되었다. 이화경은 자신의 상점에 보관되어 있던 자루 500여 장을 팔아 시위 자금을 마련하였고 구여순은 동지 규합에 나섰다. 먼저 병원을 운영하던 의사 정용식(鄭容軾)과 협의한 뒤 최정학(崔正學)·이우식(李祐植)·김봉연(金琫淵) 등과 정용식의 병원에서 3월 14일 의령 장날에 만세 시위를 거행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일을 맡았다. 면 직원인 전용선(田溶璿)과 최병규(崔秉圭)에게 독립선언서 등사에 협력할 것을 지시하였다. 구여순·최정학은 이러한 도움을 받아 3월 12일 면사무소의 등사판과 종이를 이용하여 독립선언서 수백 매를 인쇄하였다. 그리고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들에게 시위 계획을 알렸다. 14일 의령 장날 오후 1시 구여순이 “일제의 기반(羈絆)을 벗어나 조국의 독립을 쟁취할 때는 왔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자”라고 호소하면서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시위 주도자들이 군중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주었고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참여하면서 시위 군중은 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 군중은 시장에서 출발하여 경찰서 앞까지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3월 15일에도 의령향교(宜寧鄕校) 앞에 모인 1,500여 명의 군중은 “조국의 독립과 2천만의 자유를 위하여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1인까지 싸워야 한다”라는 남종혁(南宗赫)의 연설을 들은 뒤 경찰서와 군청 앞으로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연이은 만세 시위 이후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남도 의령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기미 3·1독립운동 기념비 경상남도 의령군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3 비석 3·1독립운동기념비 경상남도 의령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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