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남도 의령(宜寧) 사람이다.
1919년 3월 14일의 의령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3일 누이동생 구은득(具銀得)의 문병 차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구여순(具汝淳)과 그의 이종동생 이화경(李華卿)에 의해 계획되었다. 그들은 귀향 즉시 이곳의 청년 유지들인 정용식(鄭容軾)·최정학(崔正學)·이우식(李祐植)·김봉연(金琫淵) 등과 만나 의령읍 장날인 3월 14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당시 용덕면(龍德面) 면장이던 그는 이들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등사해 줄 것을 요청받고 쾌히 승낙한 후, 면서기 전용선(田溶璿)·최병규(崔秉圭) 등에게 면사무소의 기재를 이용하여 수백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도록 지시하였다. 3월 14일 오후 1시, 그는 많은 시위군중과 함께 의령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 3백여명이 가세하였고, 인근의 주민들이 계속 모여들어 시위군중은 점차 3천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러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와 읍내를 시위행진하고 경찰서 앞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외치고 자진 해산하였다. 그는 이튿날 다시 의령향교(宜寧鄕校) 앞에 모인 1천 5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경찰서와 군청을 시위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이화경·이원경(李源卿)·최숙자(崔淑子)·강순이(姜順伊) 등의 주동 하에 여성들도 궐기하였다. 그러나 이때 마산(馬山) 주둔 일본 포병대대에서 응원 출동한 8명의 일본군과 현지의 일본 경찰이 총검을 휘두르며 시위군중을 위협하여 해산시키고,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도 이때 체포되었으며, 진주재판소(晋州裁判所)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른 뒤 출옥하였으나, 일제에게 당한 잔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3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3·1운동실록(이용락) 684·686·68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08·31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