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경기도 파주(坡州) 사람으로, 1919년 3월 26일 김수덕(金守德)·김선명(金善明) 등과 함께 와석면(瓦石面) 일대의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미 와석면 일대는 임명애(林明愛)가 주동하여 3월 10일 교하리(交河里)에 있는 공립보통학교에서 독립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구세군(救世軍)이 그는 3월 25일 김수덕·김선명·임명애와 함께 자기 집에서 주민에게 3월 28일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할 테니 모두 동리 산으로 모이라는 격문의 원고를 작성하여 60여 매를 인쇄하였다. 이에 김선명·김창실(金昌實)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3월 26일에 7백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그는 선두에 서서 이들을 지휘하여 면사무소로 가서 사무소 유리창을 깨뜨리고 면서기들에게도 휴무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어 주재소로 행진하던 중, 연락을 받고 미리 대비하고 있던 일본 경찰의 발포로 최홍주(崔鴻柱)가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시위군중은 해산되었다.
그는 결국 체포되어 이 해 9월 29일 소위 보안법·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196∼19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555∼55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