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3.25 파주군 (坡州郡) 와석면 (瓦石面) 교하리 (交河里) 에서 김선명 (金善明) 염규호 (廉圭浩) 등과 3.28「윤환산 (山) 」으로 주민 (住民) 을 모이게 하여 독립만세 시위 (獨立萬歲示威) 를 거사 (擧事) 하자고 결의 (決議) 하고, 격문 (檄文) 60여매 (餘枚) 를 인쇄 (印刷) 배포 (配布) 한 후 3.28 시위 군중 (示威群衆) 700여명 (餘名) 을 이끌고 면사무소 (面事務所) 로 행진 (行進) 하면서 독립만세 (獨立萬歲) 를 고창 (高唱) 하며 기물 (器物) 등을 파괴 (破壞) 활동 (活動) 하다 피체 (被逮) 되어 징역 1년을 받아 옥고 (獄苦) 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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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경기도 파주(坡州) 사람이다. 파주군에서의 독립만세시위는 그가 살던 이곳 와석면(瓦石面) 교하리(交河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1919년 3월 25일 김선명(金善明) 등과 임명애(林明愛)의 집에서 염규호가 쓴 3월 28일 윤환산으로 모이라는 내용의 격문을 등사판으로 인쇄하여 약 60매를 당하리(堂下里)와 구당리(九堂里) 각 구장에게 배포하였다. 드디어 이해 3월 28일 교하리의 염규호 등과 함께 인근에서 모여든 7백여명의 군중과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면사무소를 시위행진하여 기물을 파괴하였다. 이어 주재소로 향하여 갈 때 미리 기다리고 있던 일경의 발포로 시위군중은 해산되고 그는 붙잡혔다. 그는 6월 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항고하였으나 7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고 8월 29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2卷 196·197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 224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555∼557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