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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5484
성명
한자 金守德
이명 金東晳, 金守得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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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3.25 파주군(坡州郡) 와석면(瓦石面) 교하리(交河里)에서 김선명(金善明) 염규호(廉圭浩)등과 3.28「윤환(山)」으로 주민(住民)을 모이게 하여 독립만세 시위(獨立萬歲示威)거사(擧事)하자고 결의(決議)하고, 격문(檄文)60여매(餘枚)인쇄(印刷) 배포(配布)한 후 3.28 시위 군중(示威群衆) 700여명(餘名)을 이끌고 면사무소(面事務所)행진(行進)하면서 독립만세(獨立萬歲)고창(高唱)하며 기물(器物)등을 파괴(破壞) 활동(活動)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1년을 받아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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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창(高唱) : 노래, 구호, 만세따위를 큰 소리로 부르거나 외침
  • 피체(被逮) : 남에게 붙잡힘
  • 옥고(獄苦) : 옥살이를 하는 고생.
  • 격문(檄文) : 1. 어떤 일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어 부추기는 글. 2. 급히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각처로 보내는 글. 3. 군병을 모집하거나, 적군을 달래거나 꾸짖기 위한 글.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경기도 파주(坡州) 사람이다. 파주군에서의 독립만세시위는 그가 살던 이곳 와석면(瓦石面) 교하리(交河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1919년 3월 25일 김선명(金善明) 등과 임명애(林明愛)의 집에서 염규호가 쓴 3월 28일 윤환산으로 모이라는 내용의 격문을 등사판으로 인쇄하여 약 60매를 당하리(堂下里)와 구당리(九堂里) 각 구장에게 배포하였다. 드디어 이해 3월 28일 교하리의 염규호 등과 함께 인근에서 모여든 7백여명의 군중과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면사무소를 시위행진하여 기물을 파괴하였다. 이어 주재소로 향하여 갈 때 미리 기다리고 있던 일경의 발포로 시위군중은 해산되고 그는 붙잡혔다. 그는 6월 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항고하였으나 7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고 8월 29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2卷 196·197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 224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555∼557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수덕 김동석(金東晳), 김수득(金守得) 경기도 파주(坡州) 3.1운동
본문
1904년 5월 6일 경기도 파주군(坡州郡)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파주군 와석면(瓦石面, 현 파주시 교하읍) 교하리(交河里)에 거주하였고, 학생이었다. 김동석(金東晳)·김수득(金守得) 등의 이명이 있다. 파주군의 만세 시위는 와석면 교하리에서 시작되었다. 1919년 3월 10일 교하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서 구세군이던 임명애(林明愛)는 학생 100여 명과 함께 만세 시위를 실행하였다. 이에 영향을 받아 3월 25일 김선명(金善明)과 함께 염규호(廉圭浩)·임명애 부부의 집에 방문해 만세 시위 예비 계획을 위해 방을 빌려달라고 요청하였다. 승낙을 얻은 후 임명애·염규호·김선명·김창실(金昌實)과 함께 모여 만세 시위 계획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격문을 만들어 면민들에게 배포하기로 결정하였다. 염규호가 마련한 등사판으로 ‘오는 28일 마을주민 일동은 윤환산으로 집합하라. 만약 이에 불응하면 방화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격문 60매를 인쇄하여 구당리(九堂里)와 당하리(堂下里)에 배부하였다. 이들이 계획한 시위는 당초 계획보다 하루 앞당겨진 3월 27일 실행되었다. 27일 오후 4시 무렵에 와석면 교하리에는 약 700명의 군중이 모여 들었다. 시위대는 와석면사무소를 습격하여 유리창과 지붕을 파괴하는 한편, 면서기 2명에게 투석하여 부상을 입혔다. 거센 만세 시위에 와석면장이 도망쳤고 시위는 확대되었다. 교하헌병주재소에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지점 세 곳에 각 500명씩 총 1,500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시위대는 횃불을 지피고 만세를 외쳤다. 이에 파주 분견소로부터 하사 포함 3명이 출동해서 교하헌병주재소 헌병들과 더불어 폭력을 행사하였다. 결국 일본 헌병의 발포로 당하리에 사는 최홍주(崔鴻柱)가 사망하면서 만세 시위대는 해산하고 말았다. 염규호·임명애·김선명 등과 함께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6월 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출판법과 「조선형사령 제42조」를 위반한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항소를 제기하여 7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금고 8개월로 감형되었고, 출판물 반포의 항소 사실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9월 29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최종 기각되어 형이 확정된 후 옥고를 겪었다. 한국전쟁 때 납북당했으며, 사망 일시는 알려지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징역 1년 경성지방법원 1919-06-03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금고 8월(원판결중 피고에 관한부분 취소), 출판물분포 공소사실은 무죄 경성복심법원형사부 1919-07-23 국가기록원
3 판결문 출판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19-09-29 국가기록원
4 인물카드 출판법위반 8월 경성복심법원 1919-09-29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북한소재 국립묘지 외 독립유공자가 안치된 단일묘소가 북한지역에 있는 묘소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파주 3·1운동 기념비 경기도 파주시
2 조형물 항일독립운동기념비 경기도 파주시
3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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