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0479 후손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도움말
성명
한자 金文裕
이명 金學元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등록된 사진이 없습니다.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2013 훈격 건국포장
1919년 3월 21일 경기도(京畿道) 연천군(漣川郡) 백학면(百鶴面) 두일리(斗日里) 시장에서 조우식(趙愚植)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고, 200명의 군중과 함께 동군(同郡) 미산면(嵋山面) 마전리(麻田里)까지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을 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 고창(高唱) : 노래, 구호, 만세따위를 큰 소리로 부르거나 외침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1권(2014년 발간)

김문유는 경기도 연천군(漣川郡) 백학면(百鶴面)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연천군에서는 1919년 3월 21일부터 만세시위가 일어나 4월 10일까지 연천읍내 백학면·두일·장터·마전·삭영·적성 등지에서 계속되었다. 백학면 두일리(斗日里)에서는 미산면(嵋山面) 석장리(石墻里)에 사는 조우식(趙愚植)이 주동이 되어 3월 21일 두일 장날을 기회로 하여 장에 모인 군중과 같이 만세시위를 하였다. 그리고 정현수(鄭賢秀)와 함께 면장을 데려다 만세를 부르게 했다. 구금용(具今龍)은 소방용 경종(警鍾)을 울려 군중을 모이게 하고, 조우식·정현수 등이 군중을 지휘하여 백학면사무소로 들어갔다. 면사무소 직원에게 전부만세를 부르라 하였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군중은 돌을 던져 면사무소 일부를 파손시켰는데 이때 군중은 200명을 넘었다. 이들은 저녁에 미산면 마전리(麻田里)로 행진하여 태극기를 휘날리며 학교 앞에서 대한 독립만세를 높이 불렀다.

이날 백천기(白天基)는 백학면 통강리(通江里)에서 주민 60여 명을 인솔하고 마전리 헌병주재소로 달려가 조우식이 지휘하는 시위대와 합류하였다. 이때 김문유는 이낙주(李洛周)·홍순겸(洪淳謙)·김복동(金復東)·한상혁(韓相赫) 등과 함께 주동인물로서 합류하였다.

시위 후 체포된 김문유는 5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항소하여, 7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그는 다시 항소하였으나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京城覆審法院:1919. 7. 7)
  • 判決文(高等法院:1919. 9. 18)
  • 刑事控訴事件簿
  • 判決文(京城地方法院:1919. 5. 22)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5집 560~562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2권 199~200면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문유 김학원(金學元) 경기도 연천(漣川) 3.1운동
본문
1894년 6월 19일 경기도 연천군(漣川郡) 백학면(百鶴面) 두일리(斗日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도 거주하였고, 날품팔이(日稼業)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이명으로 김학원(金學元)을 사용하였다. 1919년 3월 21일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의 두일리시장(斗日里市場)과 미산면(嵋山面) 마전리(麻田里)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21일 오후 5~6시경 두일리시장에서 미산면 석장리(石墻里)에 사는 조우식(趙愚植)의 주도로 독립 만세를 불렀다. 이때 시장에 나온 주민 100여 명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고, 백학면장 윤규영(尹圭榮)을 끌고 와서 만세를 부르게 하는 등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어 오후 6시 30분경 구금룡(具今龍)이 소방용 경종을 울리자, 조우식·정현수(鄭賢秀) 등 주민 200여 명과 함께 백학면사무소로 들어가서 직원에게 독립 만세를 부르라고 요구하였다.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면사무소에 돌을 던져 유리창과 건물 일부를 파손하였다. 이에 마전헌병주재소 헌병들이 출동하여 주민들의 만세 시위를 제지하였다. 그러나 만세 시위에 참여한 주민 200여 명과 함께 헌병들의 저지를 뚫고, 오후 7시 30분경 미산면 마전리로 이동하여 향교 및 학교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불렀다. 이때 두일리시장의 만세 시위 소식을 들은 백학면 통강리(通江里)의 백천기(白天基)가 주민 60여 명을 이끌고 마전리로 와서 합류하였다. 기세가 오른 시위 군중과 마전헌병주재소 앞에서 만세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낙주(李洛周)·홍순겸(洪淳謙)·김복동(金復東)·한상혁(韓相赫) 등과 함께 다음 날인 3월 22일 새벽까지 독립 만세를 절규하며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었다. 이 일로 1919년 5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항소를 제기하여 7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취소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다시 “자기의 행위는 정의·인도에 근거하여 의사 발동한 것이므로 범죄가 아니다”라며 상고하였으나,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0년 6월 17일 만기 출소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소요, 보안법위반 징역 2년 경성지방법원형사부 1919-05-22 국가기록원
2 판결문 소요, 보안법위반 징역 1년 6월(원판결 취소) 경성복심법원형사부 1919-07-07 국가기록원
3 판결문 소요, 보안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19-09-18 국가기록원
4 인물카드 소요, 보안법위반 1년6월 경성복심법원 1919-07-07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김문유(관리번호:30479)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