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0권(1993년 발간)
충남 천안(天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25일 당시 천안군 입장면(笠場面)에 있는 직산(稷山) 금광회사(金鑛會社)에 근무하고 있으면서, 동료인 박창신(朴昌信)·한근수(韓根守)·백학서(白學西)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다. 이들은 박창신의 집에서 태극기를 만드는 등 준비를 서둘러 3월 28일 직산 금광회사의 광부 200여명의 규합,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벌이면서 이를 저지하려는 일군헌병과 충돌하자 헌병의 무기를 빼앗으려 하는 한편, 헌병주재소를 습격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군헌병의 무차별 발포로 시위가 해산되고 붙잡혔다.
이해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117∼119면
- 판결문(1919. 5. 9 공주지방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