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충남 천안(天安) 사람이다.
천안군 입장면 양대리(笠場面 良垈里)에 거주하였으며 직산금광(稷山金鑛)의 광부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 위해 자택에서 태극기를 만들며 거사준비를 갖추어 왔다.
1919년 3월 20일 오전 10시경 양대리 장터에 나가 70여 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부르고, 이어서 민옥석(閔玉錫) 등과 합세하여 입장장터로 몰려나가 3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행진을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이해 4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고 7월 17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0년 3월 25일 출옥 후 동지 민창현 등과 중국 동삼성(東三省) 및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43년 3월 26일 일경에 붙잡혀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옥사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1919. 4. 28 公州地方法院)
- 判決文(1919. 7. 17 高等法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117·118面
- 判決文(1919. 6. 9 京城覆審法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