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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1593
성명
한자 朴商鍾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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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5 훈격 애족장
1919. 4. 5. 충남(忠南) 청양군(靑陽郡) 정산면(定山面) 서정리(西亭里) 정산(定山) 시장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홍범섭(洪梵燮)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 동일 오후 3시 경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손에 들고 약 700 명의 군중과 더불어 장터를 누비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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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충남 청양(靑陽)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5일 충남 청양군(靑陽郡) 정산면(定山面) 서정리(西亭里) 정산(定山) 시장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홍범섭(洪梵燮)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그는 홍범섭·임의재(任毅宰)·홍세표(洪世杓)·윤석희(尹錫禧) 등과 정산 장날인 4월 5일에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을 세우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정산시장의 장날인 4월 5일 오후 3시에 박상종 등은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1백여 명의 장꾼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면서 시위행진을 시작하였다. 일본 헌병은 만세군중 30여 명을 연행하면서 만세시위를 진압하고자 했으나, 이에 격노한 시민들 7백여 명이 만세시위를 거행하면서 연행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 때 정산 향교(鄕校) 직원인 권흥규(權興圭)가 일제의 총탄을 맞아 순국한 일이 벌어지면서 만세시위는 더욱 불같이 일어났다. 4월 6일 1천여 명의 시위군중들은 권흥규의 상여를 따라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였는데, 이 때 권영진은 태극기를 만들고 또 장례 명정(銘旌)에 「배일사 권흥규지구(排日士權興圭之柩)」라고 크게 써 만세군중의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일본군은 운구행렬에 대하여 발포함으로써 시위군중 가운데 6명이 순국하고, 1백 66명이 태형을 받는 등 야만적 탄압을 받았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6월 1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7월 17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1185·118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138∼142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상종 - 충남 청양(靑陽) -
본문
1881년 3월 7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정산면(定山面) 백곡리(白谷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청양군 정산면 만세운동 계획에 참여하여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1919년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가던 시기에 백곡리의 홍범섭(洪梵燮)은 서울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목격하고, 이에 공감하여 귀향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하였다. 홍범섭은 투숙하고 있던 종로의 여관에서 입수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후 만세운동을 제안하기 위해 평소 교류하고 있던 주변의 유림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였다.1919년 4월 5일 아침 일찍 윤석희(尹錫禧)·임의재(任毅宰)·홍세표(洪世杓) 등이 홍범섭의 자택을 방문하였다. 이들과 독립선언서를 같이 읽고 만세운동을 결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지역 주민이 많이 모이는 정산 장날이 마침 당일이었기 때문에 즉시 만세운동을 실행하기로 하였다. 홍범섭의 집에서 만세시위에서 사용할 태극기를 제작하고 있을 때 백곡리 출신 임창순(任昌淳)·임철재(任哲宰)·김세환(金世煥)·김필현金(弼鉉)·윤구학(尹龜學)·이건호李(建鎬) 등이 도착해서 만세운동에 동의하고 그 준비에 합류하였다.오후 3시경 홍범섭·임의재·홍세표·윤석희 등과 함께 서정리(西亭里)의 정산장터로 나가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시장에 나온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배포하며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날 정산헌병분견소에서는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가 발생할 것을 경계하여 정산시장 북쪽에 헌병을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이 때문에 만세시위가 시작되자마자, 헌병이 즉각 출동하여 만세시위를 제압하였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홍범섭·임의재·윤석희 등 유림과 서로 손을 잡고 선두에 서서 시위대를 이끌고 정산시장으로 재진입하였다. 이들과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재차 만세시위를 전개하면서 임의재·윤석희와 함께 “한국은 이미 독립했으니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시장에 나온 주민들에게 호소하였다. 이에 100여 명의 군중이 호응하여 만세시위에 동참하였고, 이들과 태극기를 흔들며 시장의 곳곳을 행진하면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정산시장의 만세시위가 확대되어 가자, 일본 헌병은 시위대에 즉시 해산을 강압하는 동시에 만세시위를 주도한 3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이때 홍범섭·임의재·윤석희 등과 함께 붙잡혀 청양헌병분견소로 연행되었다.이 모습을 보고 분노한 사람들이 만세시위에 동참하면서 만세시위대 규모는 70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권흥규가 시위대를 이끌고 헌병분견소로 달려가서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이때 일본 헌병의 발포로 권흥규가 사망하였다. 이로 인해 정산시장의 시위는 다음 날인 4월 6일 권흥규의 시신을 운구하는 과정에서 정산면에서 목면 일대까지 1,000여 명이 넘는 주민이 참여한 대규모 만세시위로 발전하였다.1919년 5월 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한 결과, 그 해 6월 1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년으로 감형되었다. 다시 무죄임을 주장하며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7월 2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1년 6월 공주지방법원 1919-05-05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1년(원판결 취소) 경성복심법원 1919-06-13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19-07-26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백곡3.1운동기적비 충청남도 청양군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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