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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6623
성명
한자 金東河
이명 金東化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2 훈격 애족장
1919. 4. 7 충남(忠南) 홍성군(洪城郡) 장곡면(長谷面)의 독립만세시위를 위하여 화계리(花溪里) 앞산으로 시위군중 500여명을 모이도록 하여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고 도산리(道山里) 소재(所在) 면사무소(面事務所)로 달려가서 목석(木石)으로 유리창과 온돌연통 등을 부수고 문기둥을 파괴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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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0권(1993년 발간)

충남 홍성(洪城) 사람이다.

1919년 4월 7일 홍성군 장곡면(長谷面)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화계리(花溪里) 앞산에서 주민들을 규합, 5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하여 도산리(道山里)에 있는 면사무소를 습격, 건물을 부수며 공문서 및 기물 등을 파손하였다. 이튿날에도 다시 집결하여 면사무소 앞에서 계속해서 시위를 전개하다가 저지하는 일경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생겨 시위가 중단되자 신의주(新義州)로 피신하였으나 1920년 1월 신의주에서 일군 헌병에게 붙잡혔다.

이해 2월 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3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고 4월 19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19. 5. 2. 대구지방법원)
  • 판결문(1920. 3. 22. 경성복심법원)
  • 판결문(1920. 4. 19 고등법원)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1181·118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134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동하 金東化 충청남도 홍성(洪城) 장곡면 만세시위
본문
1892년 11월 2일 충청남도 홍성군(洪城郡) 장곡면(長谷面) 가송리(佳松里)에서 태어났다. 장곡면에서는 1919년 4월 4일 윤형중(尹衡重)·윤익중(尹益重)·윤낙중(尹樂重) 3형제의 주도와 윤의석(尹宜錫)·윤만수(尹萬洙)·이문재(李文載) 등의 적극적인 참여로 화계리·광성리·신풍리 등의 마을 주민 500여 명이 합세하여 횃불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장곡면에서 두 번째로 일어난 4월 7일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가송리와 인접한 화계리 마을 앞산에서 주민들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쳤다. 오경춘(吳敬春)이 종을 쳐서 화계리 주민들과 인근 광성리, 신풍리 주민들을 집합시켜 300여 명에 이르자 군중은 화계리에서 도산리로 이동하였다. 도산리 면사무소 뒷편 응봉산에 올라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주도 인사 윤형중이 군중에게 ‘면사무소는 면을 대표하여 사무를 집행 처리하는 곳으로 면소재지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는 것은 지당하며, 또 면 관리도 같은 한국인이므로 공동으로 만세를 불러야 한다’라고 외치자, 만세 군중은 산 아래에 있는 면사무소로 내려왔다. 선두에서 군중을 이끌고 면사무소에 도착하였으나 면직원이 보이지 않자 격분하여 ‘역인(役人, 면 직원)이 없는 것은 있을 수 없다’라고 말하고 ‘면사무소는 역할이 없다’라며 공격할 것을 주장하였다. 숙직하던 면서기 임원규(林元圭)를 보고 ‘독립 만세를 부르라’라고 요구했으나 도주하고 말았다. 이때 이화춘(李化春, 1888~1967)·윤상운(尹相雲) 등과 함께 면사무소를 향하여 돌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군중은 돌과 몽둥이로 면사무소을 공격하여 파괴하였다. 김동완(金東完)·김용숙(金用肅)·김용제(金用濟)·김차제(金次濟, 張先)·한상철(韓相鐵) 등이 유리창 창문 17장을 깨뜨렸고 이문재·강태삼(姜泰三) 등은 문기둥을 쓰러뜨렸으며 김정랑(金正浪)·이소만(李小萬) 등은 굴뚝 1개를 뽑아버렸다. 이어 강태삼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금고를 파괴하였고, 군중도 사무실 기물과 문서들을 파손하였다. 이후 신의주로 피신하여 은신하다가 1920년 1월에 붙잡혔다. 1920년 2월 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 명목으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1920년 3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었고, 고등법원에서도 1920년 4월 19일 상고가 기각되면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소요 징역 1년 6월 공주지방법원 1920-02-05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소요 공소 기각 경성복심법원 1920-03-22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 소요 상고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20-04-19 국가기록원
4 인물카드 소요, 보안법, 기물손괴 1년6월 경성복심법원 1920-04-19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2 비석 장곡3·1운동기념비 충청남도 홍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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