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전라북도 임실(任實) 사람이다.
1919년 3월 23일 임실군 둔남면 오수리(任實郡屯南面獒樹里)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송(李起松)·이만의(李萬儀)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때 주재소에서 한국인 순사보 고택기(高宅基)가 출동하여 주동자인 이기송을 강제로 체포하여 주재소로 연행하였다. 이에 그는 이만의·이병렬(李秉烈)·김일봉(金一奉) 등 8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이기송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겁에 질린 일본인 순사 촌정(村井)이 이기송을 석방하자 그는 다시 시장으로 돌아와서 2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들과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파괴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면사무소로 시위행진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면장·면서기들에게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고 주재소로 향하였다. 주재소에 도착하여 유치장 문을 부수고 김영필(金永弼) 등 구금된 사람들을 석방시켰다. 이때 순사보 고택기가 총을 겨누며 위협하자, 그의 총을 빼앗고 경종대(警鐘臺) 아래로 끌고 나와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하였다. 그러나 이날 저녁 남원(南原) 헌병분대와 임실경찰서에서 응원 출동한 일군경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해산하였다. 이후 그는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이해 9월 30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93면
- 판결문(1919. 9. 30 대구복심법원)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505·50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