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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관리번호 1702
성명
한자 南孝直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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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 3 김세영의 권유(勸誘)로 영덕에서 만세 시위(萬歲示威)전개(展開)하며 경찰서(警察署), 우편소(郵便所), 면사무소(面事務所) 등을 습격하고 서장(署長)이하 순사(巡査)들을 구타하였음. 체포(逮捕)되어 대구(大邱)에서 징역 7년을 판결(判決)받고 복역(服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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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북도 영덕(盈德)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의 영해읍(寧海邑)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영덕군 지품면 낙평동(知品面洛坪洞)교회 조사(助事)로 있던 김세영(金世榮)이 유학 차 평양(平壤)으로 가다가 도중, 서울에 들러 국내외의 정세를 전해 듣고, 마침 그곳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즉시 귀향하여 3월 12일 구세군 참위(救世軍參尉) 권태원(權泰源)을 만나, 서로 의견을 교환하면서부터 계획되었다.

한편 그는 3월 15일 병곡면 송천동(柄谷面松川洞)교회에서 그곳을 찾은 권태원을 정규하(丁奎河)·남여명(南汝明) 등과 함께 만나, 김세영의 말을 전해 듣고, 이에 찬성하여 그들과 영해읍 장날인 3월 18일을 거사 일자로 정하고, 군내의 5대 성씨인 권(權)·남(南)·박(朴)·백(白)·이(李) 씨를 기반으로 널리 영해면·병곡면·축산면(丑山面)·창수면(蒼水面) 일대의 민중을 규합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3월 18일 정오경, 그는 정규하·남여명·박의락(朴義洛) 등 3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성내동(城內洞) 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전개한 후, 경찰주재소로 달려가서, 일본 경찰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위협하여 그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그가 장터로 돌아가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다시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갔을 때, 주임순사 영목학차랑(鈴木鶴次郞)이 거만한 태도로 해산을 명령하며 태극기를 뺏으려 하였다.

그러자 그는 분노한 시위군중과 함께 곤봉과 돌멩이로 주재소를 때려부수고 순사부장을 넘어뜨린 후, 2명의 일본 순사의 모자와 칼을 빼앗았다. 그후 공립보통학교로 시위행진하여 평소 일제의 정책을 찬양하던 이곳 교사들을 규탄하고 건물을 파괴한 후, 일본인 소학교·우편소·면사무소를 차례로 파괴하고 다시 주재소로 몰려갔다. 주재소에 도착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찬송가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주재소 안에 걸려 있던 경찰복을 모두 찢어버렸으며, 비치되어 있던 장총 4정과 87발의 실탄을 빼앗아 파기하였다.

이때 주재소의 응원 요청을 받고 영덕경찰에서 서장 무의손(茂義孫)과 4명의 경찰이 긴급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다가, 시위군중의 위세에 눌려 철수하였는데, 그는 격분한 시위군중과 함께 그들을 추적 포위하여 총과 칼을 빼앗고, 제복을 찢은 후 곤봉세례를 가하여 일본인이 경영하는 수본(水本)여관에 감금하였다. 이곳의 만세시위는 이날 밤과 이튿날까지 계속되어, 오전 11시경 포항(浦項)헌병대에서 출동한 일본 헌병분대장과 6명의 헌병이 이를 제지하려 하였으나, 그들도 이 엄청난 군중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후 5시경, 대구(大邱)에 있는 일본군 보병 80연대로부터 장교이하 17명이 출동하여, 헌병들과 합세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함으로써,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해산하였다. 그후 일제는 대대적인 검속을 펼쳤으나 체포되지 않았으므로 이해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궐석재판으로 7년형을 받았으며 그후 체포되어 1922년 8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공무집행 방해·건조물 손괴·기물 손괴·공문서 훼기·상해 및 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19. 6. 5 대구지방법원)
  • 고등경찰요사 30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3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426·428·429·43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403∼1410·1411·1412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남효직 - 경북 영덕(盈德) 영덕군 영해면 만세운동
본문
1875년 3월 17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영해면(寧海面) 괴시동(槐市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8일 영덕군 영해면 성내동(城內洞) 만세시위를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이다.영덕 지역의 만세운동은 영덕군 지품면(知品面) 낙평동(洛坪洞) 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이 서울의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한 뒤 평양신학교 유학을 단념한 채 고향에 돌아와 만세시위를 계획하면서 시작되었다. 3월 12일 김세영은 낙평동 교회의 구세군 참위로 있던 권태원(權泰源)에게 서울·평양·대구 등지의 만세시위 상황을 전하며, 영덕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키자고 제안하였다. 이튿날 김세영이 일본 경찰의 예비 검속에 검거되었으나 권태원은 그의 말에 따라 병곡면(柄谷面) 송천동(松川洞) 교회 조사 정규하(丁奎河)와 함께 만세시위 계획을 구체화하고 동지들을 규합해 갔다.본래 김세영이 영덕 읍내에서의 만세시위를 제안했었다. 그러나 정규하가 송천동 부근의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유림까지 모두 규합하여 영해면 성내동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자고 제의해 이에 따르게 되었다. 만세운동은 주로 기독교·천도교·불교 등의 종교 세력과 학생 세력이 주도했다고 일컬어지지만 유림의 활약도 적지 않았다. 특히 영남 지방은 유림의 본거지였기 때문에 그 활약상 또한 다른 지역에 비해 컸다.권태원은 송천동에 대대로 살아온 권씨 일문에게 만세시위에 참여하도록 설득하였고, 정규하는 송천동 교회 교인들에게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또한 정규하는 창수면(蒼水面) 인양동(仁良洞)의 명망가인 권상호(權相鎬)를 만나 창수면 오촌동(梧村洞)·인양동과 영해면 원구동(元邱洞)의 권씨와 백씨 일문의 참여를 권유해 달라고 요청하였다.이런 상황에서 집으로 찾아온 권태원·정규하와 만세시위를 논의하였다. 같은 자리에 있던 남여명(南汝明)은 하번동(下煩洞)의 무안 박씨를, 자신은 영해면 괴시동(槐市洞)의 유림인 영양 남씨 일문을 설득하기로 하였다. 이처럼 영덕 지역의 대표 유림이라고 할 수 있는 5대 성씨, 즉 권씨·남씨·박씨·이씨·백씨를 규합해 내는 과정에서 적극 참여하였다.영덕군의 만세시위는 3월 18일부터 4월 4일까지 약 보름에 걸쳐 일어났지만, 실제 시위가 일어난 날짜는 3월 18일·19일·21일과 4월 4일 나흘이다. 영덕군 내 9개 면 중에서 6개면에서 시위가 일어났는데, 북부 지역(창수면·병곡면·영해면)의 시위는 남부 지역(지품면·영덕면·남정면)과 달리 매우 격렬한 형태를 띠었다. 특히 영해의 만세시위는 3월 18일과 19일 양일간에 걸쳐 일어났고, 격렬함을 보였던 대표적 지역 중 한 곳이다.영해 만세시위 당일인 3월 18일, 남여명과 장터의 싸전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정규하와 박희락(朴羲洛) 등이 장터 중심부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는 것에 맞추어 군중과 함께 시위에 가담하였다. 시위에 참여한 군중의 수는 3,000여 명에 달하였다. 시위대는 먼저 영해공립보통학교로 향하였다. 훈도와 학생들에게 만세시위에 호응할 것을 종용한 뒤 영해경찰관주재소로 몰려갔다. 주재소의 책임자인 일본인 순사 부장 스즈키 쓰루지로(鈴木鶴次郞)가 해산을 명하자, 시위대는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순사들의 칼을 빼앗고 집기를 부쉈으며 서류를 찢어버렸다. 그리고 학교로 돌아가 건물과 기구를 파괴하였으며, 심상소학교·우편소·면사무소 등도 파괴하였다. 시위를 주도한 인물들은 단 위에 올라 연설을 하고 노래를 지휘하며 군중과 함께 부르기도 하였다.만세시위 이틀째인 3월 19일에는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포항의 헌병대와 대구의 보병 제80연대가 시위대 진압을 위해 영해에 집결하여 군중을 향해 실탄을 사격하면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후 일본 군경이 펼친 대대적인 검속에도 불구하고 붙잡히지 않았다.그러나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궐석으로 재판이 이루어져 소요, 공무집행 방해, 건조물 손괴, 기물 손괴, 공문서 훼기, 상해,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7년을 받았다. 이후 붙잡혀 1922년 8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같은 이유로 징역 3년(미결 구류 일수 25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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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소요, 공무집행방해, 건조물손괴, 기물손괴, 공문서훼기, 상해, 보안법위반 징역 7년 대구지방법원 1919-06-05 국가기록원
2 판결문 소요, 공무집행방해, 건조물손괴, 기물손괴, 공문서훼기, 상해, 보안법위반 징역 3년(단, 미결구류일수 중 25일 본형에 산입) 대구지방법원 1922-08-23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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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북도 영덕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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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장소 영해주재소 3.1운동 만세시위지 경상북도 영덕군
2 영해 3·18만세운동 기념탑 경상북도 영덕군
3 영해 3·1의거 탑 경상북도 영덕군
4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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