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12일 의성군(義城郡) 비안면(比安面) 쌍계동(雙溪洞)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곳에서는 평양의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온 안평면(安平面) 괴산교회 김원휘(金原輝) 조사(助事)와 대구에서 만세운동을 목격한 괴산교회 박우완이 쌍계교회(雙溪敎會) 목사 박영화(朴永和)에게 만세운동을 제의하면서 계획이 추진되었다. 이들은 쌍계교회 교인 박영신(朴永信)·배달근(裵達根) 등을 참가시키면서 논의를 거듭한 후, 3월 13일 쌍계동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김명출을 비롯한 배도근(裵道根)·박세길(朴世吉)·이일만(李一萬) 등을 새로운 동지로 규합하고, 태극기 200여 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거사일 하루 전인 3월 12일, 비안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학교 뒷산에서 만세운동을 벌이자, 교인들과 마을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오후 1시경, 학생들이 마을로 돌아오자 대기한 군중들은 박영화·박영신·배중엽 등이 나누어 준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학생 50여 명을 비롯한 200여 명의 시위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동네를 행진하였다. 그러나 오후 4시쯤 비안주재소에서 출동한 경찰에 의해 박영화를 비롯한 주동자 5명이 검거되었으며, 군중들은 해산하였다. 그 후 관련자 다수가 체포되어 17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김명출도 3월 12일 쌍계동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동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연호(連呼)ㆍ고창하며 동네를 행진하였다.
이날 시위로 붙잡힌 김명출은 1919년 4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大邱地方法院, 1919. 4. 17)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368∼372面
- 抗日獨立運動 義城郡資料集(의성문화원, 1992) 48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