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북도 의성(義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동(比安面雙溪洞)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3일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 입학하기 위하여 평양에 갔다가 서울·평양 등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귀향한 김원휘(金原輝)가 박영달(朴永達)·박영화(朴永和)를 만나면서 계획되었다.
한편 대구계성학교(大邱啓聖學校) 학생으로서 대구학생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박영화 목사의 아들 박상동(朴尙東)이 귀향하여 그곳 소식을 전달하면서부터 독립만세운동 계획이 구체화되었다. 이때 그도 김원휘·배중엽(裵重曄)·박영신(朴永新) 등과 만나 의견을 나누며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3월 12일 그는 박영신의 집에서 박영화·박영달·배중엽과 함께 2백여개의 태극기를 제작하여, 이날 정오경, 박영신의 집 앞에 모인 2백여명의 시위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이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동리를 시위행진한 후, 뒷산에 올라가 만세를 외치고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때 급보를 받은 의성경찰서에서는 이날 오후 4시, 순사부장과 경찰이 이곳 주재소로 응원 출동하여 대대적인 검거 작업을 펼쳤는데, 결국 그는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4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19. 4. 26 대구복심법원)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69·37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312·131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