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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120
성명
한자 朴永新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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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 3. 7 의성군(義城郡) 비안면(比安面) 쌍계동(雙溪洞)에서 동지들과 모의하여 독립만세운동 거사준비를 하고 동월 12일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하다 피체되어 징역 1년형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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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북도 의성(義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12일의 비안면 쌍계동(比安面雙溪洞)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3일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 입학하기 위하여 평양에 갔다가 서울·평양 등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귀향한, 김원휘(金原輝)가 박영달(朴永達)·박영화(朴永和)를 만나면서 계획되었다.

한편 이때 대구계성학교(大邱啓聖學校) 학생으로서 3월 8일의 대구학생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박영화 목사의 아들 박상동(朴尙東)이 그곳 소식을 전달하면서부터 독립만세 계획이 구체화되었다. 이때 그도 김원휘·배중엽(裵重曄)·배달근(裵達根) 등과 만나 의견을 나누며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3월 12일 그는 자기의 집에서 박영화·배중엽·박영달·배달근과 함께 2백여개의 태극기를 제작하여, 이날 정오경, 그의 집 앞에 모인 2백여명의 시위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이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동리를 시위행진한 후, 뒷산에 올라가 만세를 외치고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때 급보를 받은 의성경찰서에서는 이날 오후 4시, 순사부장과 경찰이 이곳 주재소로 응원 출동하여 대대적인 검거 작업을 펼쳤는데, 결국 그는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19. 4. 4 대구지방법원)
  • 판결문(1919. 4. 26 대구복심법원)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7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312·1313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영신 - 경북 의성(義城) -
본문
1891년 2월 3일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비안면(比安面) 쌍계동(雙溪洞)에서 태어났다. 쌍계교회(雙溪敎會)의 담임 목사인 형 박영화(朴永和)와 함께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동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의성군 비안면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초순 개시된 서울과 평양의 독립만세운동 소식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이에 자극을 받은 대구의 자체적인 만세시위의 영향이 파급되면서 기독교도와 학생들의 연합시위로 발전한 특징을 띠었다. 비안면 만세시위의 단초는 그 해 3월 3일 평양의 만세시위를 목격하고 돌아온 기독교인 김원휘(金原輝)가 제공하였다. 김원휘는 곧바로 쌍계동 장로교회 목사인 박영화를 찾아가 경성과 평양의 독립운동 상황을 전하며, 의성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만세운동을 준비하자고 강력히 주장하였다.일주일 후 대구의 학생단이 일으킨 학생 중심의 만세시위는 비안면의 만세시위를 구체적인 조직화 단계로 도약시키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대구 만세시위 소식이 도내로 급속히 전파되는 와중에, 현장에서 의거를 목격한 괴산동(槐山洞) 교회의 박우완(朴又完)과 박영화의 아들 박상동(朴尙東) 등은 대구의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와 기독교계 인사와 유지들에게 만세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 소식에 자극을 받은 지역의 기독교도와 학생들이 곧 의기투합하여 공동 행동을 결의하면서 만세운동이 본격화되었다.기독교계 인사들의 구체적인 거사 준비는 김원휘의 주도하에 박영화와 박영달(朴永達)이 비밀 모임을 가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은 3월 6~7일경 쌍계동과 괴산동의 교회당에서 만나 만세시위에 대한 협의를 마치고 곧바로 동지를 물색하여 포섭하였다. 이때 형 박영화를 통해 거사 준비 소식을 전해 듣게 되면서, 계획에 즉각 찬동하고 거사에 동참할 것을 약속하였다. 3월 12일 자택에서 형 박영화와 배중엽(裵重曄)·배달근(裵達根)·박영달 등 동지들과 회합하며 태극기 200여 개를 제작하였고, 이날 정오를 기해 독립운동시위 거사를 진행하기로 약정하였다.한편, 만세시위를 준비하던 비안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이들보다 하루 앞선 3월 11일에 거사하기로 계획하고 전교생에게 이 사실을 비밀리에 통보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첩보를 미리 입수한 일본 군경의 삼엄한 경계로 인해 부득이하게 거사일을 3월 12일로 변경하였다. 3월 12일에 전교생 150명은 학교 뒷산에 올라 일제히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였다. 일본 군경과 교원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오후 1시경 쌍계동의 기독교인과 합류하였다.쌍계동 자신의 집 앞 도로에 모인 학생과 마을 주민 200여 명에게 주도자들과 함께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배포하여 거사의 개시를 알렸다. 그리고 곧바로 시위대의 전열에 서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온 동네를 행진하는 시위를 주도해나갔다. 시위대를 이끌고 마을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해산하여 평화적으로 집회를 마무리하였다.그 날 오후 4시 독립만세시위에 관한 급보를 받은 의성경찰서에서 조선인 경부와 순사부장을 급파하여 비안주재소 경찰과 함께 시위 주도자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하여 검거하였다. 이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붙잡혔고, 그 가운데 18명이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1919년 4월 4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그 해 4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며 형량이 늘어나 징역 1년을 받았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5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10월 대구지방법원 1919-04-04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1년(원판결 취소) 대구복심법원 1919-04-26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 1919-05-22 국가기록원
4 인물카드 보안법위반 1년 대구복심법원 1919-05-22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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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북도 의성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3·1독립투사 기념비 경상북도 의성군
2 기미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 경상북도 의성군
3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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