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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119
성명
한자 朴永和
이명 朴英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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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3.11~3.12 3.1운동거사계획을 주도하였으며 당시 이곳 독립만세시위운동이 기원이 되어 의성군내(義城郡內) 전역에 확산시키는데 주동적 역할을 하다가 체포되어 징역2년형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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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북도 의성(義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12일의 비안면 쌍계동(比安面雙溪洞)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당시 목사로서 3월 7일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 입학하기 위하여 평양에 갔다가 서울·평양 등 전국 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귀향한 김원휘(金原輝)와 만나 그로부터 만세운동 상황을 전해 듣고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마침 이때 대구계성학교(大邱啓聖學校) 학생으로 3월 8일의 대구에서 전개된 대구학생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그의 아들 박상동(朴尙東)으로부터 대구의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김원휘·박영달(朴永達)·박영신(朴永新)·배중엽(裵重曄)·배달근(裵達根) 등과 여러 차례에 걸쳐 만나서 구체적으로 논의하였다.

3월 12일 그는 박영신의 집에서 박영달·배중엽·배달근과 함께 2백여개의 태극기를 제작하여, 이날 정오경, 박영신의 집 앞에 모인 2백여명의 시위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이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동리를 시위행진한 후, 뒷산에 올라가 만세를 외치고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때 급보를 받은 의성경찰서에서는 이날 오후 4시, 순사부장과 경찰이 이곳 주재소로 응원 출동하여 대대적인 검거 작업을 펼쳤는데, 그는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4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고등경찰요사 25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54면
  • 판결문(1919. 4. 4 대구지방법원)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67·369·370면
  • 판결문(1919. 4. 26 대구복심법원)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312·1313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영화 박영화(朴英和) 경북 의성(義城) -
본문
1859년 5월 9일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비안면(比安面) 쌍계동(雙溪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를 달리하는 박영화(朴英和)를 사용하였다. 쌍계교회의 담임 목사로 있으면서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동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의성군 비안면 만세운동을 주도한 계기는 3월 3일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평양으로 갔던 김원휘(金原輝)가 독립만세운동을 현장에서 목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담임 목사로 있던 쌍계교회로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김원휘는 경성과 평양의 독립운동 상황을 전하며 의성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에 적극 찬동하여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한편, 3월 10일 대구 학생단의 독립만세운동 소식이 도내로 급속히 전파되는 와중에, 실제 현장에서 의거를 목격하고 돌아온 괴산동(槐山洞) 교회의 박우완(朴又完)과 주도자 중 한 명이자 아들인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 박상동(朴尙東) 등이 대구에서 배포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찾아왔다. 결국 이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 준비를 시작함으로써 기독교도와 학생을 주축으로 한 독립만세운동이 본격화되었다.동생 박영신(朴永新)을 비롯해 배중엽(裵重曄)·배달근(裵達根)·박영달 등과 함께 3월 12일 박영신의 집에서 만나 태극기 2백여 개를 제작하였고, 이날 정오를 기해 독립운동시위 거사를 진행하기로 계획하였다.한편 이들과 긴밀하게 협조하며 독립만세시위를 준비하던 비안공립보통학교 학생 우희원(禹熙元)·박기근(朴基根)·박만녕(朴萬寧)·정인성(鄭寅城) 등은 3월 11일 비안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 의거를 거행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첩보를 미리 입수한 일본 군경이 장날에 삼엄한 경계를 펼쳐 부득이하게 거사일을 12일로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비안공립보통학교 전교생 150명은 학교 뒷산에 올라 일제히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면서 시위를 벌였고, 교장실에서 전날의 독립운동 도모로 강압적인 설교를 듣고 있던 주도 학생들 또한 이에 합세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러자 신고를 받고 출동한 일본 군경은 교사들과 함께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후 주도 학생들을 체포하였다. 하지만 학생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날 오후 1시경 비안면 쌍계동으로 가서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가세하여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쌍계동 박영신의 집 앞 도로에 모인 학생과 마을 주민 200여 명에게 동생 박영신 등 주도자들과 함께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배포하여 독립운동의 분위기를 고조시켜 나갔다. 뒤이어 시위대의 전열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주도해나갔고, 시위대와 함께 온 동네를 행진하면서 일제를 향해 독립 의지를 당당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을 뒷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친 후 시위대를 자진 해산시켜 평화적인 집회를 마무리하였다.하지만 그날 오후 4시 독립만세시위 소식을 전달받은 의성경찰서에서는 조선인 경부와 순사부장을 급파하여 비안 주재소 경찰과 함께 시위 주도자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하여 검거하였다. 이때 붙잡혀 일본 경찰의 모진 조사를 받고 동료 17명과 함께 기소되었다.1919년 4월 4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그 해 4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도리어 형량이 징역 2년으로 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5월 2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고 형이 최종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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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1년 6월 대구지방법원 1919-04-04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2년(원판결 취소) 대구복심법원 1919-04-26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 1919-05-22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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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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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3·1독립투사 기념비 경상북도 의성군
2 기미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 경상북도 의성군
3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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