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북도 의성(義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 봉양면 도리원(鳳陽面桃李院)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거사 전날인 3월 18일에 이양준(李良俊)을 비롯한 주동자들이 안평면(安平面)의 주민들에게 도리원 장날인 19일에 도시락을 가지고 도옥동 하단(都玉洞河端)에 모이라는 비밀연락을 취하면서 추진되었다.
3월 19일 아침, 연락을 받은 그는 계획대로 시위군중과 함께 도옥동 하단을 출발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도리원 장터를 시위행진하니 연도의 많은 군중이 시위대열에 가담하였고, 또한 이날 안평주재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끝내고 돌아가던 시위군중도 재차 이 시위에 합세하여 군중의 수는 수천명으로 늘어났다.
한편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의성경찰서에서는 당시 비안(比安)주재소에 응원 가 있는 일본 군경을 도리주재소로 급파하고 무력으로 시장을 폐쇄하는 등, 사전에 독립만세시위를 저지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나, 시위군중은 이날 오후 1시 30분경 일제측의 저지 공작에 격분하여 몽둥이와 돌을 가지고 도리 경찰주재소로 몰려가서 포위하고 투석으로 건물을 파괴하며 격렬한 만세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미리 주재소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본군경이 사태가 위급하게 되는 것을 알고 야만적인 발포를 감행하여 많은 사상자를 낸 채 시위군중은 일단 해산하였다.
일제는 무차별 총격에 격분한 시위군중이 의성경찰서와 안평주재소를 습격한다는 풍문에 겁을 먹고 대구 주둔 일본군 80연대로부터 응원을 받아 장교 이하 1백 7명의 대부대가 와서 삼엄한 경계를 펴는 한편, 대대적인 검거를 시작하였다.
그도 결국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19. 6. 26 대구복심법원)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302·1303·1304·1305·130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7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