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북도 의성(義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17일의 안평면 대사동(安平面大司洞)과 3월 19일 봉양면 도리원(鳳陽面桃李院)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3월 17일 오후 8시경 점곡면(點谷面) 송내동교회 조사(助事)인 권수백(權秀伯)의 권유를 받고, 이종출(李鍾出)·이양준(李良俊)·김옥돈(金玉頓)·이만준(李萬俊) 등 1백 5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대사동 우리곡(尤利谷) 부락에 모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창길동(倉吉洞)을 거쳐 화령동(花寧洞)까지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계속하고, 자진 해산하였다. 또한 3월 19일의 도리원 장날을 이용하여 이양준 등 수천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날 미리 정보를 입수한 의성경찰서에서는, 당시 비안(比安)주재소에 응원 출장 중이던 일본 군경을 도리주재소에 급파하여, 시장이 열릴 무렵 무력으로 시장을 폐쇄하는 등 사전에 만세시위를 저지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 썼다. 그러나 오후 1시 30분경, 일제의 저지 공작에 격분하 시위군중은 몽둥이와 돌멩이를 가지고 주재소로 몰려가 포위하고, 투석으로 건물을 파괴하며 격렬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주재소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군경의 야만적인 발포로 말미암아 많은 사상자를 낸 채 시위군중은 일시 해산되었다. 야만적인 총격에 격분한 시위군중이 의성경찰서와 안평주재소를 습격한다는 풍문에 겁을 먹고,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80연대에 응원 요청을 하여, 장교 이하 1백 7명의 일본군을 동원하여 삼엄한 경계를 펴는 한편,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다. 그는 이때 부상을 당한 채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1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30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73·374·377·37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