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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752
성명
한자 金玉頓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3.15~19 안평면 대사동 독립만세 시위를 주모하여 활동하다 검거되어 1919.5.13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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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북도 의성(義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15일부터 19일에 걸쳐 안평면 대사동(安平面大司洞)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은 대구 계성학교(大邱啓聖學校) 학생으로서 3월 8일의 대구학생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귀향하여 그날의 거사 소식을 전한 박상동(朴尙東)과 서울·평양(平壤)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한 김원휘(金原輝)의 귀향으로 만세운동이 촉진되었다. 이 소식은 박상동의 아버지이자 비안면 쌍계동(比安面雙溪洞) 교회 목사인 박영화(朴永和)에 의하여 대사동 교회에 전달되어 구체적인 만세운동 계획이 세워졌다.

마침 3월 15일이 일요일이라 대사동교회에서 낮 예배를 마친 후, 그는 교회에서 이종출(李鍾出)·이양준(李良俊)·이북술(李北述) 등과 교회에 남아 독립만세운동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하다가 당일에 거사할 것을 제의하였다. 참석자들이 적극 호응하자, 동리사람인 이만준(李萬俊)·배세태(裵世泰)·이맹준(李孟俊)·이수원(李守元)·정갑이(鄭甲伊)·이흔이(李欣伊) 등에게도 이 계획을 알려주어 또한 찬성을 얻었다. 이에 그는 이날 오후 7시경 1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대사동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자진 해산하였다.

3월 16일 오후 8시경 그는 다시 이종출·이만준 등 1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기도동(箕道洞)을 거쳐 창길동(倉吉洞)까지 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시위를 한 후 자진 해산하였으며, 이튿날 다시 이웃 2∼3개 부락민 1백 50여명을 규합하여 선두에 서서 회길동(會吉洞)에서 화령동(花寧洞)까지 독립만세행진을 한 후 자진 해산하였다.

3월 19일 낮에도 이북술과 함께 이수원·이흔이 등 4백여명의 시위군중을 다시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인근의 봉양면 사부동(鳳陽面沙阜洞)까지 시위행진을 주동하여 계속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1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고등경찰요사 25면
  • 3·1운동실록(이용락) 760∼764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2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72·373·37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306·1307·1308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옥돈 - 경상북도 의성(義城) 안평면 만세시위
본문
1889년 2월 2일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안평면(安平面) 박곡동(朴谷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에는 안평면 대사동(大司洞)에 거주하면서 대사동 교회 영수로 활동하였다.안평면에서는 1919년 3월 15일부터 19일에 걸쳐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안평면의 만세시위는 대사동 우리골(尤利谷)에서 시작되었다. 3월 11일과 12일 이종출(李鍾出)과 만나 만세시위에 대해 협의한 뒤, 15일 낮 대사동교회에서 예배를 마친 후 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60~70명에 이르는 교인과 주민들이 동의함으로써 만세시위 준비가 본격화되었다. 교인들은 태극기를 제작하고 연락을 담당하는 등 적극적으로 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15일 이들과 함께 저녁 7시경 마을 뒷산에 모여 만세를 부르다가 밤 10시경 해산하였다.다음날인 16일 50~60명의 교인과 주민들은 밤 8시경 마을 앞 밭에 모여 만세를 부르고 주재소가 위치하는 창길동까지 행진한 후 해산하였다. 17일에도 150여 명의 주민들이 우리골에 모였고, 주재소 앞에 모였을 때는 400여 명에 이르렀다. 15일과 16일에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던 경찰이 이날부터 탄압에 나서면서 12명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만세시위는 18일에도 계속되었다. 대사동 주민 300여 명은 우리골에서 만세를 부른 후 마전동·기도동·창길동·박곡동·괴산동 등 안평면의 곳곳을 행진하였다.3월 19일은 도리원의 장날이었다. 이에 이종출 등과 함께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규합하는 한편, 의성경찰서까지 진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9일 아침부터 도리원시장에 가는 사람들을 규합하였다. 시위대는 만세를 부르며 도리원시장으로 향하였다. 행진 도중 주민들도 가세하여 시장에 이르렀을 때 시위대의 규모는 이미 1,000명을 넘어섰다. 일본 경찰의 발포로 즉각 해산을 강제하면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대구에 있는 일본군 80연대 군인들까지 해산에 투입되면서 체포되고 말았다.1919년 5월 1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6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인물카드 보안법위반 징역1년6월 대구지방법원 1919-06-13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북도 의성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2 비석 항일독립운동 기념비 경상북도 의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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