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북도 의성(義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17일 안평면 대사동(安平面大司洞)과 3월 19일 봉양면 도리원(鳳陽面桃李院)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3일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 입학하기 위하여 평양에 갔다가, 서울·평양 등지에서 전개되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을 목격하고 귀향한 김원휘(金原輝)와 3월 8일의 대구(大邱) 학생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계성학교(大邱啓聖學校) 학생인 박상동(朴尙東)의 귀향과 동시에 추진되었다.
그는 당시 대사동 교회 집사로서 3월 15일 교회에서 일요일 낮 예배를 마친 뒤, 이종출(李鍾出)·김옥돈(金玉頓)·이북술(李北述)등과 교회에 남아서 독립만세운동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던 중, 당일에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오후 7시 1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16일 오후 8시에는 1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기도동(箕道洞)을 거쳐 창길동(倉吉洞)까지 시위행진한 후 자진 해산하였으며, 이튿날에도 오후 8시경, 1백 5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대사동 우리곡(尤利谷) 부락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친 뒤, 창길동을 거쳐 화령동(花寧洞)까지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자진 해산하였다.
3월 18일에는 이북술·김유식(金有式)·김도식(金道式)·이만준(李萬俊) 등 3백여명의 시우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동리 끝까지 시위행진하였고, 이튿날 낮에는 4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안평주재소로 몰려가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인근의 봉양면 도리원 장터로 행진하였다. 이미 그는 전날 안평면민들에게 도시락을 지참하고, 도옥동 하단(都玉洞河端)에 모이라는 비밀연락을 미리 취했기 때문에 그가 도리원 장터로 시우행진할 때의 시위군중은 수천명으로 늘어났다.
한편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의성경찰서에서는 인근 비안(比安)주재소에 응원 출동 중이던 군경을 도리주재소에 급파하여, 도리원장이 열릴 무렵 이를 폐쇄하고, 삼엄한 경계를 취하고 있었다. 이같은 일제의 조치에 격분한 시위군중은 몽둥이와 돌을 가지고, 도리주재소로 몰려가 그곳을 포위하고, 투석으로 건물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일본 군경의 야만적인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는데, 그도 이때 가슴에 총상을 입은 채 체포되었으며, 이해 9월 2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 혐의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상처의 악화로 가출옥하였으나, 곧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고등경찰요사 2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72·373·374·376·377·378·379·380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4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302·1303·1304·1305·130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