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경남 울산(蔚山) 사람이다.
1919년 당시 울산군 상남면 길천리(上南面 吉川里)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무종(李武鍾)·이규인(李圭寅) 등과 함께 언양(彦陽) 장날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난 후 독립을 요구하는 함성이 높아가고 있던 3월 하순 이곳 상남면에서도 천도교 계통의 유지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계획이 추진되었다. 즉 그를 비롯하여 이무종·이규인·강경찬(姜庚贊)·최해선(崔海璇)·이규경(李圭庚) 등 6명이 주동이 되어 유지들을 비밀리에 규합해갔다.
이들은 4월 2일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숨겨 가지고 이른 아침 언양 장터로 잠입하였다. 이에 앞서 4월 1일에는 양산읍(梁山邑)에서 수천 명의 만세시위가 있었기 때문에 이곳 농민들의 항일의식은 보다 앙양되어 가고 있었던 때로 울산군내의 각 면과 양산 하북면으로부터 많은 장꾼이 모여들었다. 이날 주동인물 6명은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이해 6월 10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고 6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1919. 6. 28 大邱覆審法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203·204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