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남 김해(金海) 사람이다.
1919년 4월 2일 김해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1920년 12월에 창립된 조선청년회연합회(朝鮮靑年會聯合會)에서 활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2월 23일 이갑성(李甲成)이 마산으로 내려와 이전부터 안면이 있는 사립 창신학교 교사 임학찬을 비롯한 유지 몇 사람에게 3·1운동에 관한 얘기를 전달하면서 분위기는 무르익어 갔으며, 세브란스의전 학생인 배동석(裵東奭)이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여한 뒤, 김해로 내려와 임학찬·배덕수(裵德秀)·송세희(宋世禧) 등과 협의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들은 3월 30일 밤 10시에 주도자 7명이 김해읍내의 중앙 거리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던 중 몇몇 주도자들이 붙잡혔다.
그후 임학찬 등 붙잡히지 않은 주도자들은 4월 2일 장날을 이용하여 다시 거사하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이들은 태극기를 제작하는 한편, 4월 1일 밤에 격문을 붙여 동지들을 규합하였으며, 의용대도 조직하는 등 철저한 준비를 진행시켰다.
거사 당일인 4월 2일 오후 4시 경, 임학찬이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이곳에 모인 시위군중도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일경은 재향군인을 비롯한 일인 상인·불량배들까지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시위군중을 탄압하였다. 이로써 시위군중은 해산하였고, 주도자 6명은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7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그후 석방되어, 1920년 6월 28일 조선청년회연합기성회(朝鮮靑年會聯合期成會) 발기인으로 참가하고, 이어 같은 해 12월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청년회연합회가 창립될 때 그는 김해청년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釜山·慶南 3·1運動史(3·1同志會, 1979) 692·944·945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4輯 474·478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3輯 121·122·125·140·141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0卷 988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 266·267面
- 韓國共産主義運動史(金昌順·金俊燁, 1989) 第2卷 106面
- 韓國靑年運動史(鮮于基聖, 1976) 407面
- 3·1運動實錄(3·1同志會) 620面
- 現代史資料(姜德相) 第26卷 555面
- 判決文(1919. 11. 6. 京城地方法院)
- 每日申報(1919. 11. 8, 1920. 12. 23, 12. 24)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104·108·111·113∼115·119·123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215·216·236·237面
-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1卷 分冊 489·493·495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