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1권(2014년 발간)
최덕관은 경남 김해(金海)의 김해읍(金海邑)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 였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형집행 정지로 석방된 후 순국하였다.
김해읍의 배동석(裵東奭)은 3.1운동 당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으로 서 울에서 학생 대표로 크게 활약하였을 뿐 아니라, 3.1운동이 일어난 후에는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인 김해로 내려와 김해, 마산, 함안 등지의 민중들을 독립만세시위에 나서게 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배동석과 임학찬(任學 瓚)·배덕수(裵德秀)·송세희(宋世憘) 등은 거사의 밀의를 거듭하면서 준비를 서 둘렀다.
1919년 3월 30일 밤 10시 7명의 애국인사들이 김해읍 중앙 거리로 나와 독립 만세 시위를 벌였고, 몇 명의 주동 인물이 검거되었다. 3월 30일의 이 김해읍 만세시위는 김해군내 의거의 효시가 되어 이후 각지로 번져갔다. 이때 검거를 면한 몇몇 주동 인물들은 4월 2일 김해읍 장날을 의거일로 정하고 다시 준비를 갖추었다. 전날부터 어두운 밤을 이용하여 격문을 각처에 붙이고 의용대도 조 직하였다. 4월 2일 장꾼이 가장 많이 모여든 오후 4시, 주동인물들은 약 40명의 핵심 군중과 더불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연호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 하였다.
당황한 일본 군경은 재향군인을 비롯하여 상인, 불량배까지 총동원하 여 군중을 난타하는 등 무자비하게 횡포를 감행했다. 검거된 주동자들 중 배동 석은 경성 감옥에서 복역 중 병을 얻어 세브란스 병원장의 알선으로 보석되어 2년간 치료하다가 순국하였다.
이 시위로 체포된 최덕관은 5월 3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월 집행유예 2년을 받고 항소하였다. 5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다시 징 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으로 걸린 병 때문에 10월 27일 형집행 정 지로 출옥하였으나, 12월 8일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5집 1222~1223면
- 韓國獨立運動史(國史編纂委員會, 2002) 資料 38(宗敎運動篇) 173면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判決文(大邱覆審法院:1919. 5.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