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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45356
성명
한자 金祚伊
이명 金隱谷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2008 훈격 건국포장
1922년 서울에서 여자고학생상조회(女子苦學生相助會), 1925년 1월 21일 경성여자청년동맹(京城女子靑年同盟)집행위원(執行委員)으로 활동하였고,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후보당원(候補黨員)으로 활약하면서 전만주를 무대로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가 1928년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한 후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재건을 위해 노력하던 중 체포되어 1934년 징역 3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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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김조이는 1922년 1월 창원에서 계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 고학을 하던 중 여자고학생상조회(女子苦學生相助會)에 가입해 1926년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1월 21일 서울에서 허정숙(許貞淑)·주세죽(朱世竹)·김필순(金弼順)·정봉(鄭烽)·배혁수(裵赫手)·박정덕(朴貞德) 등과 함께 사회주의 여자청년단체인 경성여자청년동맹(京城女子靑年同盟)의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종로구 낙원동에 사무실을 연 경성여자청년동맹은 여성해방 서적 연구·토론, 여성노동자 위안 음악회 개최 등의 사업을 펼쳤고, 무산아동학원 설립, 여성을 위한 문고 설치, 학술강좌 개최 등을 계획하였다.

동년 2월 김조이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다가, 4월, ‘적기(赤旗) 시위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기도 하였다. ‘적기시위사건’이란 ‘4·21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가 경찰의 불허로 무산되자 300여 명의 대표들이 종로경찰서와 동대문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벌인 사건이었다.

1925년 4월경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 후보로 활동했으며, 11월경 고려공산청년회 추천으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였다.

1930년 ‘조선공산당재조직준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되었으나 소재 불분명으로 기소중지되었다. 1931년 9월 하순 김조이는 코민테른(국제공산당) 동양부의 지시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김복만과 함께 귀국, 함흥을 중심으로 ‘조선노동좌익재결성’을 주도하다가 1932년 8월 일명 ‘제2태평양 노사사건’의 주동인물로 지목되어 함흥경찰서에 검거되었다. 당시 언론은 이 사건을 ‘함남공청사건’이라고 불렀다. 김조이는 이 사건으로 2년간 구금되었다가 기소되어 1934년 12월 17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미결구류 100일 통산)을 선고받았다. 함흥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됐고, 1937년 9월 20일 출소하였다.

해방 후 1945년 11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 인천대표로 참석했고, 12월 조선부녀총동맹에 가입하였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부녀총동맹 대의원으로 참석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고, 7월 중순경 서울에서 강제 납북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개벽(1926. 3. 1) 제66호
  • 高等警察要史(慶北警察部) 303면
  • 사상요시찰인연명부 추가의 건(1926. 4. 19) 검사사무에 관한 기록(3) 12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4집 451면
  • 일본의 한국침략사료총서(국사편찬위원회) 490~492면
  • 東亞日報(1934. 5. 18·8. 21·12. 9)
  • 東亞日報(1932. 2. 3)
  • 犯罪人名簿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 121면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별집 제2집 536면
  • 高麗共産靑年黨員 檢擧 應援의 件(1925. 12. 3) 검찰사무에 관한 기록(1) 924면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朝鮮中央日報(1934. 1. 1·12. 12·12. 20)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조이 김은곡(金隱谷) 경상남도 창원(昌原) 적기사건
본문
1904년 경상남도 창원(昌原) 출신으로 부친 김종태와 모친 배기남 사이에서 큰 딸로 태어났다. 1922년 1월 창원 계광학교(啓光學校)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효고현(兵庫縣) 후쿠시마(福島) 방적회사 직공으로 일하였다. 이후 기독교 학교인 의신학교(義信學校)에 2년간 다니다가 중퇴하고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경성여자청년회, 조선여성동우회, 여자고학생상조회(女子苦學生相助會)에 가입해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6월 30일 창원군 웅천면(熊川面) 성내리(城內里) 본가에서 당시 조선청년총동맹 상무집행위원이었던 조봉암(曹奉岩)과 결혼식을 올렸다.1925년 1월 18일 서울 관철동에서 박정덕(朴貞德)·허정숙(許貞淑)·우봉운(禹鳳雲)·김필순(金弼順)·주세죽(朱世竹) 등과 함께 경성여자청년동맹(京城女子靑年同盟)의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월 21일 서울 수표동 조선교육협회에서 열린 경성여자청년동맹 창립대회에서 전형위원과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그 해 2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 4월 조선공산당 후보당원 및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 후보로 선출되었다. 같은 달 민중운동자대회가 경찰에 의해 무산되자 이에 항의하여 300여 명의 대표들이 종로경찰서와 동대문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벌인 ‘적기(赤旗) 사건’에 참가하였다가 종로경찰서에 붙잡혔다.1925년 8월 2일 서울 제동 북풍회관에서 열린 조선노동당 지도자 전일(全一) 영결식 때 정종명(鄭鍾鳴)·허정숙·고명자(高明子) 등과 참여하여 조가(弔歌)를 했다. 같은 해 8월 서울 아현청년회관에서 아현청년회, 경성여자청년동맹, 서울인쇄직공청년동맹, 신흥청년회 등 10개 청년단체 대표 60명이 모여 한양청년연맹(漢陽靑年聯盟)을 결성할 때 집행위원으로 참여하였다.1925년 10월~11월 무렵 고려공산청년회의 추천으로 고명자·김명시(金命時)·권오직(權五稷) 등 20여 명과 상하이를 거쳐 모스크바에 있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을 떠나 1928년 말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였다. 이 무렵 조봉암과 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1930년 5월 김단야(金丹冶) 등의 ‘조선공산당(재)조직준비위원회사건’으로 수배되었으나 소재 불명으로 기소 중지되었다. 1931년 9월 하순 코민테른 동양부의 지시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위원이며 모스크바공산대학 출신 김복만(金福萬)과 함께 귀국하여 함경남도 함주군(咸州郡) 주서면(州西面) 흥도리(興島里)에서 거주하였다. 함흥성천제방공사장(咸興城川堤坊工事場)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남편 김복만과 흥남질소비료공장을 중심으로 ‘흥남조선좌익노동조합결성’을 주도한 ‘제2차태평양노동조합사건’의 핵심 관계자로 1932년 8월 함흥경찰서에 붙잡혔다.한편 1933년 11월 7일 함흥경찰서에 갇혀 있던 김복만과 ‘제2차태평양노동조합사건’ 관련자 125명이 함께 유치장에서 러시아혁명을 기념하여 적기가를 불렀다. 붙잡힌 지 18개월 동안 검찰에 송국도 하지 않고 여자 감옥 1개와 남자 감옥 5개에 120명이 넘는 인원이 수용되고 음식도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열악한 처우를 받자 11월 21일 이에 항의하고자 단식 농성을 하였다.당시 일본 경찰은 이 사건을 태평양노동조합태로(太勞), 함흥자유노동조합자로(自勞), 공산청년회공청(共靑) 3개의 개별사건으로 구분하였다. 김복만·오기섭(吳琪燮)·강목구(姜穆求)·정태옥(鄭泰玉) 등 30여 명과 ‘함남공청사건’에 연루되었다. 이들 30여명 중 김복만과 함께 주도자급으로 분류돼 1934년 8월 16일 함흥지방법원검사국으로 송국(送局)되었다. 이 사건으로 2년을 함흥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1934년 12월 17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함흥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1934년 12월 29일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어 1937년 9월 20일 풀려났다.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인물카드 치안유지법위반 징역3년 100일 통산 함흥지방법원 1934-12-17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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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북한소재 국립묘지 외 독립유공자가 안치된 단일묘소가 북한지역에 있는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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