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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5007
성명
한자 姜琪秀
이명 姜琪秀, 姜璂秀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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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2000 훈격 건국포장
1919. 3. 19 경남(慶南) 함안군(咸安郡) 함안읍(咸安邑) 장날을 이용하여 군중(群衆)과 함께 독립만세(獨立萬歲)고창(高唱)하고 주재소(駐在所)를 습격, 기물(器物)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만세 시위(萬歲示威)를 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았으며 1920년 단성청년회(丹城靑年會)의 간부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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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창(高唱) : 노래, 구호, 만세따위를 큰 소리로 부르거나 외침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남 산청(山淸)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 경남 함안읍 장날에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금융조합 서기로 재직하던 그는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배 차 서울에 올라갔다가,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독립선언서를 휴대하고 거주지인 함안면으로 돌아왔다.

서울의 시위에서 크게 자극받은 그는 곧바로 조한휘(趙漢輝)·이찬영(李讚榮) 등 유지인사들과 모임을 갖고 함안에서의 만세시위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대산면(大山面) 한문교사 안지호(安知鎬)와 연락을 취하며, 3월 19일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태극기를 제작하고 독립선언서를 다량 등사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19일 정오경, 주도자들은 봉성동(鳳城洞)에 모인 수백 명의 시위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준 뒤,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오후 2시가 되자 시위군중은 3천여 명으로 늘어났고, 시위군중은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주재소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때 출동한 마산경찰서와 현지 일경들이 무력으로 시위군증을 해산시키려고 하자, 이에 격노한 시위군중은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더욱 사기가 오른 시위군중은 등기소·우체국·일본인 소학교를 시위행진하며 건물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긴급출동한 마산 중포병대대의 총검을 앞세운 탄압으로 시위대는 해산되고 말았다. 그는 이와 같은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이해 5월 19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소요, 보안법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1920년 8월 산청군 단성읍에서 개최된 단성청년회(丹城靑年會)의 창립총회에 참가하여 사교부장에 선임되었다. 이어 총무 등의 직책을 맡아 청년회를 이끌며 청년계몽운동 등에 종사하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1922년 6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월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3·1運動實錄(李龍洛, 1969) 727面
  • 東亞日報(1920. 8. 29)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함안항일독립운동사(李圭奭, 함안문화원, 1998) 191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3卷 297·298面
  • 判決文(1919. 5. 19. 釜山地方法院 馬山支廳)
  • 判決文(1922. 6. 7. 大邱覆審法院)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강기수 강기수(姜璂秀) 경상남도 산청(山淸) 3.1운동
본문
1898년 11월 26일 경상남도 산청군(山淸郡) 도산면(都山面, 현 신안면) 소이리(所耳里)에서 태어나 함안군(咸安郡) 함안읍(咸安邑)에 거주하였다. 이명으로 강기수(姜璂秀)를 사용하였다. 1919년 금융조합 서기로 재직하던 중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한관렬(韓灌烈) 등과 함께 광무황제(고종)의 인산에 참례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3월 1일 서울의 만세 운동에 참여한 뒤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함안으로 내려왔다. 서울에서의 만세 시위에 크게 자극을 받아 동지들과 함안 장날에 독립 만세 운동을 추진하기로 결의하였다. 대산면(大山面)의 한학 훈장 안지호(安知鎬)와 논의하여 시위 날짜를 정하고, 한종헌(韓鐘憲)·조한국(趙漢國) 및 안신학교 학생 대표인 김도권(金道權) 등과 태극기를 제작하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며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19일 정오경 봉성동(鳳城洞)에 수백 명의 주민이 모이자 준비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고 큰 소리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오후 2시경 시위에 참여한 주민이 3,000여 명으로 늘어나 대규모의 시위대를 형성하자, 이들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며 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이때 출동한 일본 경찰들이 무력으로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하자 격분한 시위대와 함께 도끼와 곤봉, 돌을 들고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어 우체국·등기소·일본인 소학교 등의 건물을 부수는 등 격렬하게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5시 40분경 마산 중포병대대 준하사관 이하 16명과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재차 무력으로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주동 인물과 참여자들을 검거할 때 체포되었다. 5월 19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및 소요 혐의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1920년 8월 산청군 단성읍에서 개최된 단성청년회(丹城靑年會) 창립총회에서 간부로 선출되어 청년회를 이끌었다. 1921년 동아일보사 전주지국 산청분국장을 지냈다. 지역에서 청년을 계몽하는 사회활동을 이어가다가 재차 체포되어 1922년 6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개월 형을 선고받고 다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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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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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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