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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387
성명
한자 朴永黙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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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919.3월경 하동(河東) 고전 3.1운동에 참가하여 1919.5.16 부산지법(釜山地法) 진주지청(晋州支廳)에서 징역 2년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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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남도 하동(河東) 사람이다. 1919년 4월 6일의 고전면 주교리(古田面舟橋里)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같은 마을의 이종인(李宗仁)·정상정(鄭相正)·정의용(鄭宜鎔) 등 33인과 더불어 일신단(一身 )을 조직하고, 목숨을 바쳐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는 이들과 함께 4월 6일의 주교리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일신단 동지인 정재기(鄭在基)에게 하동읍에 가서 독립선언서를 구해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재기가 도중에 체포되어 일제는 더욱 삼엄한 경계를 펴게 되었다. 4월 6일 오후 1시 40분경, 주교리 장터에 1천여명의 장꾼이 모이자, 그는 미리 만들어 놓은 태극기를 들고 단상에 올라가 간단한 연설을 한 뒤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장터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있던 일신단원 및 장꾼들이 일제히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조선인 경찰 박도준(朴道俊)과 일본 헌병 3명이 출동하여 제지하자, 시위군중은 그들의 총검을 빼앗는 한편 모자와 제복을 벗기고 구타하였다. 그러나 급거 응원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의 무력행사로 시위군중은 해산하였다. 다음날 아침, 일본 헌병 20명과 경찰 10명이 주동자를 체포하기 위하여 그의 고향인 성천리(城川里) 지소부락(紙所部落)에 총을 난사하며 들이닥치자, 그는 미리 부녀자와 아이들을 동리 뒤의 삼봉산(三峰山)으로 대피시킨 뒤, 정상정·이종인·정의용과 함께 주동자임을 자처하며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이해 5월 16일 부산(釜山)지방법원 진주(晋州)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수형인명부(고전면장 발행)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281·282·283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영묵 - 경남 하동(河東) 일신단
본문
1881년 5월 5일 경상남도 하동군(河東郡) 고전면(古田面) 성천리(城川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1919년 4월 6일 고전면 주교리(舟橋里, 현 고전면 고하리) 주교리시장(배다리장터)에서 펼쳐진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같은 마을의 이종인(李宗仁)·정상정(鄭相正)·정의용(鄭宜鎔) 등 뜻을 같이하는 동지 33인을 모아 일신단(一身團)을 조직하고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일신단은 “오직 한 뜻, 한 가지, 한 몸처럼 뜻을 모아 일생을 바쳐 투쟁한다”는 의미였다. 4월 6일 배다리장터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일신단 동지 정재기(鄭在基)에게 독립선언서를 구해오도록 하였다. 그 과정에서 정재기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지만, 비밀이 누설되지 않아 시위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1919년 4월 6일 거사 당일 장꾼으로 가장하고 시장으로 잠입한 후 동태를 살피다가 오후 1시 40분경 미리 만들어 놓은 태극기를 들고 단상에 올라 의거의 취지를 설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배다리장터는 인근 각지에서 장꾼들이 모여드는 규모가 꽤 큰 시장이었다. 시위가 벌어진 장날에는 고전면 주민은 물론 인근 양보면良(甫面)·진교면(辰橋面)·금남면(金南面) 주민들이 모여들었고, 1,000여 명이 넘는 군중이 만세운동에 합세하였다. 선두에 서서 군중을 이끌며 시위를 전개하고 있을 때 일본 경찰 1명과 한국인 경찰 1명, 일본 헌병 3명이 출동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하였다. 일신단원들이 달려들어 총검을 빼앗았고, 폭력을 가하여 헌병 2명과 경찰 1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에 일본군 수비대가 급히 파견되어 시위대를 해산시켰다.다음 날인 4월 7일 아침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을 체포하기 위해 일본 헌병 20명과 경찰 10명이 성천리 지소마을에 총을 난사하며 몰려들었다. 미리 부녀자와 아이들을 마을 뒷산으로 대피시키고 마을 사람들의 피해를 우려하여 자진해서 붙잡혔다. 이 일로 1919년 6월 4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소요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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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남도 하동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3·1독립운동 의거 기념비 경상남도 하동군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3 비석 하동군 고전면민 만세운동 기념비 경상남도 하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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