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1919년 4월 5일의 양산군 기장읍(梁山郡機張邑)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았으며, 마침 3월 13일 김수문(金守文)이라는 마부(馬夫)가 주워 온 서울의 독립선언서를 김도엽(金度燁)·권철암(權鐵巖)·구수암(具壽巖)·김수룡(金壽龍)·이택규(李澤奎)·박공표(朴孔杓) 등과 함께 남문(南門) 앞 축구장에서 공람하고, 이에 고무되어 기장읍 장날인 4월 5일 오전 11시를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28일 김도엽·김수룡은 기장 면사무소의 재무서기인 최창용(崔昌鎔)으로부터 면사무소의 등사기와 원지 14매를 얻어서 장관청(將官廳)에서 4백여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고, 또 김도엽이 「양심발원인도적 자유민족(良心發原人道的自由民族)」이라고 혈서한 큰 기와 대형 독립기도 제작하였다. 4월 5일 오전 11시, 그는 다른 주동자들과 함께 장터에 나아가 혈서와 독립기를 장터 복판에 꽂아두고, 1백여명의 시위군중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준 뒤, 그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함께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그러나 곧 출동한 일본 경찰의 야만적인 발포로 인하여 군중은 해산하였다. 그후 그는 일제의 검속으로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14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부산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199-20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208-121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