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4.5 경남 (慶南) 동래군 (東萊郡) 기장 (機張)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거사 (擧事) 키로 결정하고, 독립선언문 (獨立宣言文) 400여매를 등사하는 한편 「조선독립 만세 (朝鮮獨立萬歲) 」「조선독립국 (朝鮮獨立國) 」이라는 대기 (大旗) 와 「양심 발원 (良心發原) 인도적 (人道的) 자유민족 (自由民族) 」이라는 대기 (大旗) 를 만들어 거사 당일 (擧事當日) 시위군중에게 배포하면서 대기 (大旗) 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 (高唱) 하다가 피체 (被逮) 되어 징역 1년6월을 받고 옥고 (獄苦) 중 고문 (拷問) 으로 인한 득병 (得病) 으로 병보석되었으나 형기 내 (刑期內) 에 향년 20세로 사망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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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0권(1993년 발간)
경남 동래(東萊) 사람이다. 1919년 4월 5일 동래군 기장면(機張面)에서 마부인 김수문(金守文)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입수한 권철암(權鐵巖)·김도엽(金度燁)·김수룡(金壽龍)·최기복(崔基福)·이택규(李澤奎)·최창용(崔昌鎔)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뜻을 모아 기장면사무소 서기인 최창용으로부터 등사기를 빌려 독립선언서 400여매를 등사하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대형 기와 태극기를 만들었다. 또한 동지들과 혈서로 '양심발원(良心發源)'·'인도적 자유민족(人道的自由民族)'이라고 쓴 큰 기를 준비하였다가 기장면 장날을 이용하여 장터에 모인 군중에게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고 1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경에게 붙잡혔다. 같은 해 5월 1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6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다가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병보석되었으나 1920년 5월 1일 나이 20세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19. 6. 11. 대구복심법원)
- 제적등본
- 양산군지(양산군지편찬위원회, 1986. 11. 30) 16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199∼20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1208∼1210면
- 국제신문(1990. 8.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