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6604
성명
한자 金度燁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2 훈격 애국장
1919.4.5 경남(慶南) 동래군(東萊郡) 기장읍(機張邑)에서 마부(馬夫)김수문(金守文)으로부터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입수(入手)하여 권철암(權鐵巖)등 7인이 기장(機張) 장날에 거사(擧事)하기로 결의하고 동면사무소(同面事務所) 서기(書記) 최창용(崔昌鎔)으로부터 등사기(謄寫機)를 빌려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 400여매와 「양심 발원(良心發原) 인도적(人道的) 자유민족(自由民族)」이라 혈서(血書)(旗)등을 앞세워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며 활동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2년 6월을 받고 1930. 6. 10. 중국에서 항일 활동하다 평양에서 피체(被逮)되어 징역 2년 6월((計) 5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0권(1993년 발간)

경남 동래(東萊) 사람이다.

1919년 4월 5일 동래군 기장면(機張面)에서 마부인 김수문(金守文)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입수한 권철암(權鐵岩)·구수암(具壽岩)·김수룡(金壽龍)·최기복(崔基福)·이택규(李澤奎)·최창용(崔昌鎔)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기장면사무소 서기인 최창용으로부터 등사기를 빌려 독립선언서를 400여매 인쇄하였으며, '양심발원(良心發源), 인도적 자유민족(人道的 自由民族)'이라고 혈서한 기와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기장면 장날을 이용,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고 1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해 5월 1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6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0년 6월 10일 박용선(朴容善)과 함께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망명하여 항일활동을 펴다가 평남 평양(平壤)에서 일경에게 붙잡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1919. 6. 11. 대구복심법원)
  • 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199∼201면
  • 3·1운동실록(이용락) 600·60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1207∼121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도엽 - 경상남도 동래(東萊) 3.1운동
본문
1899년 7월 29일 경상남도 동래군(東萊郡) 기장면(機張面) 대라리(大羅里, 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대라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아버지는 김두복(金枓馥)이고, 어머니는 송영숙(宋永淑)이다. 독립운동가 김두봉(金枓奉)이 오촌 당숙이며, 김두전(金枓全, 일명 김약수)과도 같은 일가이다. 친동생 김규엽(金圭燁)은 기장 지역 노동운동과 청년운동을 이끈 활동가이자 기장읍 3·1운동 때 함께 시위를 주도하였다. 일찍이 비밀결사 단체인 기장광복회(機張光復會)에서 활동하다가 1917년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붙잡혔다. 1919년 4월 5일 기장읍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3일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동래시장 시위에서 기장면의 김수문(金守文)이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서재선(徐再先)에게 전달하였다. 서재선으로부터 남문 앞 축구장에서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후 권철암(權鐵巖)·구수암(具壽巖)·김수룡(金壽龍)·최기복(崔基福)·이택규(李澤奎)·박공표(朴孔杓) 등과 함께 본격적으로 기장에서의 만세 운동을 준비하였다. 거사 일은 4월 5일 기장읍 시장 장날로 정하였다. 기장면사무소 재무서기 최창용(崔昌鎔)의 협조로 등사기와 등사판용 원지를 손에 넣고 독립선언서 400여 매를 등사하는 등 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또한 혈서로 ‘양심발원 인도적 자유민족’이라고 쓴 큰 깃발과 대형 태극기도 제작하였다. 4월 5일 기장시장 장날 아침 일찍부터 동지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깃발을 휴대하고 시장으로 가서 군중에게 나눠주었다. 오전 11시경 1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일제 경찰은 공포탄을 쏘면서 이들을 위협하였으나 시위는 오후 5시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지원부대가 달려와 해산할 수밖에 없었고 다른 주동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5월 1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6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다시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김약수(金若水)의 영향으로 1924년 결성된 사회주의 사상단체 북풍회에 가입하였고, 1925년에는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였다. 고려공산청년회 파견 학생으로 러시아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였다. 1928년 9월 조선공산당 관계자로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평양경찰서에 구금되어 조사를 받다가 1930년 6월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겪고 1931년 10월 말 석방되었다. 이후 고향 기장으로 돌아왔으나 혁명적노동조합과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1932년 다시 부산경찰서에 붙잡혔다. 1933년 1월에는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 단체인 조선반제동맹 경성지방결성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혁명적노동조합 운동을 전개하던 중 다시 붙잡혔다. 1934년 8월 24일 폐병으로 인한 병보석으로 출옥하였고 건강이 악화되어 12월 28일 공판 정지가 결정되었다. 여러 차례의 구금과 고문의 후유증으로 1937년 10월 6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징역 2년 6월(원판결 취소) 대구복심법원 1919-06-11 국가기록원
2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19-08-30 국가기록원
3 인물카드 치안유지법위반 2년 6월 대구지방법원 - 국사편찬위원회
4 인물카드 치안유지법위반 - - - 국사편찬위원회
5 인물카드 치안유지법위반 - - - 국사편찬위원회
6 인물카드 치안유지법위반 - - -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안내
미확인
  • 해당 유공자는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입니다. 더보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사적지 기장장터 3.1운동 만세시위 준비지-명정의숙 부산광역시 기장군
2 부산 3·1독립운동 기념탑 부산광역시 동래구
3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4 기장항일운동기념탑 부산광역시 기장군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김도엽(관리번호:6604)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