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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86
성명
한자 金壽龍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0 훈격 애족장
1. 1919년 3. 1 중앙학교 재학 시(中央學校在學時) 현상윤(玄相允)의 권고로 독립선언서를 배부할 책임을 맞고 파고다~ 단성사(團成社)까지 연도(沿道)의 일반인 및 상점에 선언서를 배포함.

2. 1919년 3. 5 제2차 시위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태극기를 제작하여 시위운동을 전개

3. 그 후 귀향하여 기장군(機張郡)(동래군(東萊郡))에서 서울에서 가져온 선언서를 등사하여 5개면에 배부하고 4. 4 좌천시장(佐川市場)에서 4. 5 기장시장(機張市場)에서 시위운동을 일으키다가 4. 6일 왜경에 피체(被逮)되어 주모자로써 2년형을 받고 복역(치안국 지문대조조회)

4. 출옥 후 교편생활, 신문사등에서 근무하였으나 요시찰인으로 감시를 받다 해방을 맞이함(국회의원 이정래의 추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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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남도 양산(梁山) 사람이다. 1919년 4월 5일의 양산군 기장읍(梁山郡機張邑)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 때 서울의 중앙학교(中央學校) 학생으로서, 현상윤(玄相允)의 권고로 이날 파고다공원에서 단성사( 成社) 일대에 걸쳐 연도에 모인 일반인과 상점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그후 고향인 기장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곳에서 김도엽(金度燁)·권철암(權鐵巖)·구수암(具壽巖)·최기복(崔基福)·이택규(李澤奎)·박공표(朴孔杓) 등과 함께 기장읍 장날인 4월 5일 오전 11시를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28일, 그는 김도엽과 함께 기장면사무소의 재무서기인 최창용(崔昌鎔)으로부터 면사무소의 등사기와 원지 14매를 얻어서 장관청(將官廳)에서 4백여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또한 김도엽이 「양심발원인도적자유민족(良心發原人道的自由民族)」이라고 혈서한 큰기와 대형 독립기도 제작하였다. 4월 5일 11시, 그는 다른 주동자들과 함께 장터에 나아가 혈서와 독립기를 장터 복판에 꽂아두고 1백여명의 시위군중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준 뒤, 그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함께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그러나 곧 출동한 일본 경찰의 무력행사로 일단 해산하였지만, 그는 다시 4월 10일 기장공립보통학교 교정에서 50여명의 시위군중을 모아놓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199·200·20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208∼121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수룡 - 경남 동래(東萊) -
본문
1901년 4월 20일 경남 동래군(東萊郡) 기장면(機張面, 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교리(校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서울에서 신문사에 다니다 만세 시위에 참여한 이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인 기장으로 내려갔다.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은 기장지역의 김도엽(金度燁)·권철암(權鐵巖)·구수암(具壽巖)·최기복(催基福)·이택규(李澤奎)·박공표(朴孔杓)·오기원(吳基元) 등과 함께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거사 일은 기장면 장날인 4월 5일로 잡았다. 3월 28일, 기장면사무소의 재무서기인 최창용(崔昌鎔)으로부터 면사무소의 등사기와 등사판용 원지 14매를 얻어서 옛 기장 장관청(將官廳)에서 400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1919년 4월 5일 11시, 다른 주동자들과 함께 기장시장으로 가서 선언서를 군중에게 배부하고 독립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양심발원 인도적 자유민족(良心發原人道的自由民族)”,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단”이라고 쓴 큰 깃발을 들고 나아가 100여 명의 시위 군중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준 뒤, 선두에 서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행진하였다. 시위대 수가 점차 늘자 일제 경찰이 공포를 쏘며 위협하였으나 시위는 오후 5시까지 계속되었다. 다음 날인 4월 6일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6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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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징역 2년(원판결 취소) 대구복심법원형사제2부 1919-06-11 국가기록원
2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19-08-30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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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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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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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사적지 기장장터 3.1운동 만세시위 준비지-명정의숙 부산광역시 기장군
2 부산 3·1독립운동 기념탑 부산광역시 동래구
3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4 기장항일운동기념탑 부산광역시 기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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