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1919년 3월 24일 오후 2시경 경기도 부천군(富川郡) 계양면(桂陽面) 장기리(場基里) 장터에는 심혁성(沈爀誠) 등의 주도로 2백여 명의 군중들이 모여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때 부내(富內) 경찰관주재소에서 니노미야 키소지[二宮喜三次] 등 4명의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심혁성을 연행하려 하였다. 이에 분노한 시위군중은 순사들에게 대들며 심혁성의 석방을 격렬히 요구하였다. 이를 틈타 심혁성은 포승을 풀고 도망하였다. 순사들이 그를 추격하려 하자 군중들은 순사들을 주먹으로 때리고 돌을 던지며 거세게 대항하였다. 그러자 다급해진 일본 순사는 칼을 빼들고 무력진압에 나섰다. 이로 인하여 시위대 앞에 있던 이은선(李殷先)이 일경들이 휘두른 칼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날 밤 이은선의 6촌인 이담(李)은 이를 분하게 여겨 계양면장 안병혁(安柄赫)과 면서기 이경응(李敬應)에게 부탁하여 동리 사람들에게 밤 12시에 면사무소로 모이도록 알리는 통문을 만들어 돌렸다. 이에 따라 밤 12시 2백여 명의 면민들이 면사무소에 모였다.
이때 최성옥도 이 연락을 받고 면사무소로 갔다. 그런데 이경응이 나오지 않자 군중들은 ‘그가 범한 죄가 있어서 여기에 모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먼저 그의 집을 부숴버리자’고 하였다. 그는 분노한 군중들과 함께 선주지리(仙住地里)에 살고 있는 이경응의 집으로 달려가 그 집의 대문과 벽을 부수며 격렬히 항쟁하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10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과 소요·훼기·직무집행방해 등으로 징역 10월(미결구류 90일 통산)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불복하여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당하고 결국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豫審終結書(京城地方法院, 1919. 9. 13)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150∼151면
- 判決文(京城覆審法院:1919. 11. 19)
- 判決文(京城地方法院:1919. 10. 29)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권 316∼32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