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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60288
성명
한자 金裕寅
이명 李鍾範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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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국내항일 포상년도 2005 훈격 애족장
1919. 3월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군중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종로방면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으며 동년 4월에는 비밀리에 『독립신문』을 제작 배포하여 만세시위의 전개상황 등을 전파하고 임시정부(臨時政府) 수립을 위한 국민대회(國民大會) 개최를 준비하는 등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았으며 1924년에는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의 결성에 참여하여 규약(規約) 기초위원(起草委員)으로 선임되었고 소위 출판법 위반으로 체포된 바가 있으며, 1924년 10월 서울청년회계의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결성에 참여하여 교양부 책임을 맡아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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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그는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열린 독립만세선언식에 참가한 뒤, 군중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종로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동년 4월에는 만세시위 상황을 널리 알리기 위해 비밀리에『독립신문』을 제작 배포했으며,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대회(國民大會) 개최를 준비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4년에는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 결성에 참여하여 규약기초위원(規約起草委員)으로 활동하였고, 1924년 10월 서울파 사회주의 조직인 고려공산동맹(高麗共産同盟) 결성에 참가하여 교양부 책임을 맡았다. 1927년에는 고향인 북청(北靑)에서 신간회(新幹會) 지회를 만드는데 앞장서 임시의장으로 활약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京城地方法院, 1920. 10. 28)
  • 朝鮮日報(1927. 7. 7)
  • 東亞日報(1927. 7. 8)
  • 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4권 141·14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10권 114·1012면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 비평사, 1996) 105면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별집 제2권 39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권 78∼81·132∼144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3권 116∼120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유인 - 함경남도 북청(北靑) 3·1운동, 국민대회, 전조선청년당대회, 13인회
본문
1893년 6월 27일 함경남도 북청군(北靑郡) 노덕면(老德面) 동리(東里)에서 아버지 김경윤(金敬胤)과 어머니 최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 다니고 있던 중, 파리강화회의를 앞두고 한국 독립을 선언하는 기운이 높아지던 1919년 2월 귀국하였다. 그 해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벌어진 독립선언식에 참석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종로쪽으로 이어진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3월 중순 무렵부터 이규갑(李奎甲)·김사국(金思國) 등과 함께 국민대회를 준비하였다. 먼저 통일성 없이 배포되고 있던 한국 독립에 관한 출판물의 통일을 기하고자 장채극(張彩極)·한창환(韓昌桓)·이철(李鐵) 등과 함께 『독립신문』을 제작하여 3월 하순부터 4월 중순 사이에 17호를 시작으로 27호까지 인쇄·배포하였다.또 4월 23일로 예정된 국민대회의 실행을 위해 장채극 등과 함께 학생 및 시위 참여자를 조직하고, 「국민대회 취지서」 와 「임시정부선포문」 등을 인쇄·배포하였다. 4월 23일의 국민대회가 계획대로 되지 않자, 이틀 후인 4월 25일 고무 풍선에 ‘독립만세’와 ‘공화만세(共和萬歲)’를 써 붙이고 시위를 하고자 계획하며 시위에 필요한 자금 100원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준비 중 동지들이 붙잡혀 성공하지 못하였다. 4월 30일 세브란스병원에 오창수(吳昌洙)라는 가명으로 입원하여 일제 경찰의 체포를 피하고 은신하였다.1920년 2월 28일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는 전단지를 인쇄·배포하려고 준비하던 중 발각되어 붙잡혔다. 그 해 10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 1921년 5월 1일 출옥하였다.출옥 후 서울청년회에 가입하고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2년 10월 11일 김사국·이영(李英)·장채극 등과 함께 서울파 공산주의 그룹을 조직하였다. 1923년 2월 20일 서울파 전위 조직인 고려공산동맹(高麗共産同盟) 창립에 참여하여 김사국·이영 등 16명과 함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해 3월 전조선청년당대회(全朝鮮靑年黨大會)를 준비·실행하고, 3월 31일 모임이 금지 당하자 대회 속행을 위한 교섭위원이 되어 경찰과 교섭하였다. 또 이 대회에서 결성된 동아일보 비매동맹(非買同盟)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4월 15일에 평론잡지사인 청년당사(靑年黨社)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8월 30일 국제청년데이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선전지를 인쇄·배포하려던 계획이 발각되어 이영 등과 함께 이른바 출판법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구속 상태로 조사받았다.1924년 3월 통일된 조선공산당 결성을 협의하기 위해 소집된 13인회에 서울파를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1924년 4월 21일부터 열린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 창립대회에서 규약기초위원(規約起草委員)으로 활동하였고, 7월 14일 서울청년회에서 결성된 암태(岩泰) 소작인 아사동맹(餓死同盟) 동정단(同情團)의 실행위원이 되었다. 12월 7일 서울청년회관에서 창립된 사회주의자동맹회의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5년 4월 16일 열린 서울파 전위조직 고려공산동맹 2차 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재선되었고, 4월 17일에는 조선사회운동자동맹 발기취지서 발표에 참여하였다. 1925년 함남(咸南)청년대회 준비위원, 1926년 함남청년연맹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3월 사상단체총동맹 창립준비위원회를 준비하고 사단체합동회(四團體合同會)와 전진회(前進會)의 합동간담회에 전진회측 대표로 참가하였다. 그 해 6월 북청(北靑)청년연맹의 임원으로 선출되었다.1927년 4월 10일 전(全) 북청사회단체간친회의 사회를 맡아 북청사회단체협의회 결성을 결의하고 그 협의위원이 되었다. 7월에 신간회 북청지회(北靑支會) 설립대회의 임시의장을 맡아 진행하고 정치문화부 간사가 되었다. 1930년 8월 초 원산경찰서에 서울계 공산당 검거사건에 관련되어 붙잡혔다가 석방되었다. 1932년 9월 북청에서 전등요금 인하운동의 실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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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징역 1년, 미결구류일수 180일 본형에 산입 경성지방법원 1920-10-28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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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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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유골을 화장하여 산이나 강, 바다 등에 흩뿌려 묘소를 특정하기 어려운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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