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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221
성명
한자 黃道文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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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2001 훈격 건국포장
1919. 3월 서울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에 재학 중 독립선언서와 국민회보를 휴대하고 귀향하여 경기도 강화에서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유봉진(劉鳳鎭) 등의 지역 유지들과 협의하여 주민들의 시위운동 참여를 촉구하는 내용의 항일문서와 독립보(獨立報) 등을 인쇄 배포하는 등 거사를 준비하여 동년 3월 18일 강화군(江華郡) 부내면(府內面) 읍내시장(邑內市場)에서 만여명의 군중이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토록 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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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경기도 강화(江華)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 강화군 부내면(府內面) 읍내(邑內)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그 진행을 주도하였다.

연희전문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황도문은 3월 8일 길상면(吉祥面) 온수리(溫水里) 교회 목사 이진형(李鎭亨)의 집에서 황유부(黃有富)·유봉진(劉鳳鎭) 등을 만나,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이튿날 교회로 모이도록 연락을 취하였다.

3월 9일, 교회에는 염성오(廉成五)·유희철(劉熙哲)·장흥환(張興煥) 등 수십 명이 모였는데, 이때 조종환(趙鍾桓)이 서울에서의 독립만세 시위상황을 설명하고 강화에서도 호응해야 한다고 하자 모두 이에 찬성하였다.

황도문은 다시 황유부를 만나, 이 달 18일 읍내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이들에게 [강화군민에게]라는 권유문을 각지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3월 18일 오후 2시 읍내 장터에는 1만여 명의 시위군중이 운집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시위의 주동자였던 유봉진은 일본 경찰에 붙잡혔으나, 황도문은 장봉도로 피신하여 등사판을 땅에 묻고 제물포에 가서 다시 선언문을 뿌렸다. 이후 황도문은 강원도 등지로 3년 동안 숨어 다니다가 강화에 돌아와 기독교 계통의 신흥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하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豫審終結決定書(京城地方法院, 1919. 10. 4)
  • 判決文(京城地方法院, 1919. 12. 18)
  • 京畿道抗日獨立運動史(경기도사편찬위원회, 1995) 481∼489面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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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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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기념관 강화 3·1운동 역사기념관 인천광역시 강화군
2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3 비석 강화 3·1독립운동 기념비 인천광역시 강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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