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경기도 강화(江華) 사람으로, 기독교(基督敎)인이다.
1919년 3월 18일 강화군 부내면 읍내(府內面邑內) 장터의 대대적인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그 진행을 주도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3월 8일 자기 동네인 길상면 온수리(吉祥面溫水里) 교회 목사 이진형(李鎭亨)의 집에서 황유부(黃有富)·황도문(黃道文) 등과 만나,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세우고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이튿날 교회로 모이도록 연락을 취하였다.
3월 9일, 교회에는 염성오(廉成五)·유희철(劉熙哲)·장흥환(張興煥) 등 수십 명이 모였는데, 이 때 조종환(趙鍾桓)이 서울에서의 독립만세 시위상황을 설명하고 강화에서도 호응해야 한다고 하자 모두 이에 찬성하였다.
황도문·황유부와 다시 만나 이 달 18일의 읍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그들에게 「강화군민에게」라는 권유문을 각지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염성오도 3월 12·13일 독립선언서와 국민회보(國民會報)를 각지에 돌리며 참여를 권유하였다. 그는 16일 홀로 주문동(注文島)에 가서 그 곳 교회에 모인 기독교인들에게 독립만세 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3월 18일 오후 2시 읍내 장터에는 1만여 명의 시위군중이 운집하였다. 그는 예정시간보다 약간 늦어, 백마(白馬)를 타고 달려와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장터에 있는 종루(鍾樓)에 올라가 종을 마구 치며 시위군중의 용기를 북돋우었다.
이 때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강화 경찰서에서 염이선(廉履善) 등 4명의 조선인 순사보가 출동하여 제지하자, 그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강요하며 구타하였다. 그는 시위군중을 이끌고 군청으로 가서, 군수 이봉종(李鳳鍾)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강요하고, 만일 불응하면 군청을 파괴하겠다고 협박하였다.
그는 다시 시위군중을 향교로 인솔하여, 장터에서 체포된 유희철과 조기신(趙基信)을 석방시키기 위하여 경찰서 앞에서 시위하자고 제의하고, 오후 5시경 경찰서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경찰서 건물을 파괴한다고 협박하며 검거된 자들의 석방과 장터에서 칼을 뽑아들고 진압하려 했던 조선인 순사보 김덕찬(金德贊)을 내보내라고 외쳐댔다.
그러나 결국 체포되어 1920년 3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출판법·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156∼15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335∼34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