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강원도 양양(襄陽) 사람이다.
1919년 4월 9일 양양군내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던 소위 기사문(其士門)운동의 계획에 박원병(朴元秉) 형제·오세옥(吳世玉)·이응렬(李應烈)·오정현(吳鼎鉉)과 함께 참여하였다.
이들의 원래의 계획은 양양읍에 가서 만세운동을 벌일 계획이었으나, 그 지방의 원로인 김익제(金翼濟)가 읍으로 가는 것을 만류하고 군중으로 하여금 관할 주재소를 습격하도록 권유하였다. 이에 따라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며 기사문리(其士門里)에 있는 주재소를 향하여 행진하며 가로수 받침대와 장작·돌로 무장했다.
이미 주재소는 이 사실을 사전에 탐지하고 강릉에서 지원부대까지 동원하여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대한제국만세를 외치는 1천여명의 군중은 한국인 순사 이홍근(李弘根)의 만류를 뿌리치고 주재소로 돌진하였다. 이때 일본 군경의 무차별 발포로 임병익을 비롯하여 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이종남(李鍾南)등 20여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향토지(양양문화원)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624·62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