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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821
성명
한자 孫秉熙
이명 宋祥憲, 李祥憲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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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한민국장

관련정보


2019년 0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92년 0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동학란(東學亂) (後) 망명하였으며 1901년 일본(日本) 대판(大阪)을 거쳐 상해(上海)로 가서 이상헌(李相憲)으로 변명(變名)하더니 후에 동학당(東學黨) 3세 교주(敎主)가 되었음.

2. 국치(國恥) 후에는 인재양성(人材養成)진력(盡力)하였으며 1차대전(一次大戰)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세계 개조(世界改造)표어(標語)가 되어 세계(世界) 신질서(新秩序) 건설(建設)태동(胎動)하든 1919년 2월 조선민족대표(朝鮮民族代表) 33인의 필두(筆頭)로 조선독립을 선언 하고 적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겪으다가 병으로 보석(保釋)되어 요양중(療養中)

3. 1922년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서거(逝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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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충청북도 청원(淸原) 출신이며, 천도교(天道敎)인이다.

1882년(고종 19)에 동학에 입교하여, 1884년(고종 21) 교주(敎主)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지도를 받았다.

1894년(고종 31)의 동학혁명 때에는 통령(統領)으로서 북접(北接)의 동학혁명군과 논산(論山)에서 합세하여, 호남(湖南)과 호서(湖西)지방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전하자 원산(元山)·강계(江界) 등지에서 은신생활을 하였다.

1897년(광무 1)부터 최시형의 후임자로서 3년간 지하에서 교세확장을 위해 힘쓰다가, 1901년(광무 5) 일본을 경유해서 상해로 망명하여 이상헌(李祥憲)으로 개명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세창(吳世昌)·박영효(朴泳孝)등을 만나 국내사정을 전해듣고, 1905년(광무 9)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최시형의 뒤를 이어 3세 교주로 취임하여 교세확장 운동을 벌이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普成社)를 창설하고 보성학교(普成學校)와 동덕학교(同德學校)를 인수하여 교육사업에도 공헌하였다.

1908년(융희 2) 박인호(朴寅浩)에게 교주 자리를 인계하고 우이동으로 은퇴하여 수도에 전념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국에 가까워져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려던 때에,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평소에 뜻을 같이하고 있던 보성고등보통학교장(普成高等普通學校長) 최린(崔麟)·천도교 도사(道師)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제반사항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월 하순 그들과 함께 먼저 동지를 모아서 민족의 대표자로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하여 국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한편,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조선의 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고, 또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 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제반계획의 실행을 최 린에게 맡겼다. 이에 천도교, 기독교(基督敎)·불교(佛敎)에 대한 동지규합이 진행되었다. 2월 26일 최 린이 최남선(崔南善)과 수차 협의 끝에 독립선언서와 청원서·의견서 등의 초안을 작성하자, 그는 권동진·오세창과 함께 이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에 참배키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 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권병덕(權秉悳)·나용환(羅龍煥), 장로 이종훈(李鍾勳)·홍병기(洪秉箕), 교인 김완규(金完圭) 등에게 독립만세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28일 밤에는 재동(齋洞)의 자기집으로 동지들을 불러 회합하는 자리에서, 당초에 독립선언 장소로 정한 파고다 공원에서 학생들이 모여 독립만세 운동을 벌일 계획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장소를 인사동(仁寺洞)에 있는 명월관(明月館)지점 태화관(泰華館)으로 변경하였다. 또 당일에는 이갑성(李甲成)에게 조선총독부에 조선독립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서를 제출하여 알리고, 회합장소를 떠나지 않고 조용히 포박 당하기로 약속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가운데, 길선주(吉善宙)·유여대(劉如大)·김병조(金秉祚)·정춘수(鄭春洙)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참석하였다. 손병희는 민족대표 중의 대표자로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의 진행을 주도하여, 이종일(李鍾一)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00매를 탁상위에 놓고 회람케 한 후, 한용운(韓龍雲)의 인사말에 이어 만세삼창을 외치고,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병사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독립운동년감 1·94면
  • 고등경찰요사 14·17·20·22·72·86·113·188·253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3·16·425·431·465·775·787·813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493·574·647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332·679·697·698~702면
  • 기려수필 235·243·268·277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153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1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16·21면
  • 벽옹김창숙일대기 68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13권 6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67·102·333·556·75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502·522·56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189·66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165·173·179·20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280·1020·1022·109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1·14·16·17·20~22·28·38·41·43~44·4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2권 38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97·123·124·131·132·1433·1468·147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439·46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3권 94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65·89·95·96·97·100·103·147·204·241·403·443·464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67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307·309·782·784·788·793·794·800·803·806·810·812·813·814·818·823~828면
  • 박은식전서(상) 514·663면
  • 매천야록 313면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18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8권 16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10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50·56·147·19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131·323·324·332·378·379·565·568·632·640·663·665·867·869·920·93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596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손병희 초명 ; 응구(應九), 개명 : 규동(奎東), 자 : 상현(相鉉), 호 : 소소(笑笑), 도호 : 의암(義菴), 이명 : 이상헌(李祥憲) 충북 청주(淸州) 동학농민운동, 3·1운동
본문
1861년 4월 8일 충북 청주군 북이면(北二面) 대주리(大舟里, 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에서 아버지 손두흥(孫斗興)과 어머니 경주 최씨(慶州崔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자는 상현(相鉉), 호는 소소(笑笑)이다. 초명은 응구(應九), 개명은 규동(奎東), 천도교에서 사용하는 도호(道號)는 의암(義菴), 이명은 이상헌(李祥憲)이다. 동생 손병흠(孫秉欽)도 동학에 입도하여 일생을 함께 하였다. 딸 셋을 두었는데 첫째 사위는 3 · 1운동 민족대표인 이종훈(李鍾勳)의 장남 이관영(李觀泳), 둘째 사위는 정광조(鄭廣朝), 셋째 사위는 소파 방정환(方定煥)이다. 재가녀의 자식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서자로 차별을 받게 되자, 부조리한 사회에 저항하는 의식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왔으며, 호방한 기질과 의리도 남달리 뛰어났다. 결혼 후에도 서자 취급을 받으며 가족 제사를 같이 지낼 수가 없자 곡괭이로 조상의 묘를 파내려고 한 적도 있었고, 초정약수에서 양반들의 차별에 의협심이 발동하여 행패를 부리기도 하였다. 1882년 10월 5일 동학에 입도하였다. 동학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큰조카인 손천민(孫天民)의 권유였으나, 동학 입도를 거절하였다. 두 번째는 동학접주 서택순(徐宅淳)의 권유였다. 동학의 목적이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輔國安民), 지상천국건설(地上天國建設)에 있다는 것을 알고 동학에 입도하였다. 동학에 입도하여 스승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을 만난 후 하루 주문 삼만 독(讀)과 짚신 두 켤레 삼는 것을 주 일과로 삼았다. 1884년 최시형과 함께 공주 가섭사에서 49일 수련을 하면서 동학의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1892년 동학교단에서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공주와 삼례에서 전개한 교조신원운동에 참가하였다. 1893년 1월 서울 광화문 앞 교조신원운동에서는 소수(疏首)인 박광호(朴光浩), 손천민, 박인호(朴寅浩) 등과 함께 책임자로 참가하여 동학 교조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달라고 호소하였다. 광화문 교조신원운동에서 외세의 침략을 목격한 동학교인들은 이해 3월 10일 충북 보은군 장내리에서 ‘척양척왜(斥洋斥倭)’를 내세우며 척왜양 창의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최시형으로부터 충의대접주(忠義大接主)에 임명되었다. 1894년 9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호서동학군 통령(統領)으로 참가하였다. 충북 옥천군 청산면 문암리 집결한 동학군을 지휘하여, 논산 초포에서 전봉준(全琫準)이 지휘하는 호남동학군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였다. 공주를 점령하기 위해 치른 이인전투에서는 승리하였으나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하였다. 이후 논산 황화대전투를 거쳐 정읍까지 후퇴하였다가 다시 북상하여 충북 영동과 보은 종곡, 충주 무극에서 관군 · 일본군 연합부대와 싸웠으나 패하였고 자신이 이끌던 동학군을 해산하였다. 이후 관군의 추격을 받았으나 탄압의 손길이 크게 미치지 않는 함경도와 평안도 지방으로 피신해 지내면서 교세 확장과 포교에 힘썼다. 최시형으로부터 의암(義菴)이라는 도호를 받았다. 동학농민운동 이후 피신생활을 하면서도 최시형을 모시었고, 1897년 12월 24일 동학의 종통을 이어받아 3세 교조가 되었다. 교조가 된 뒤 동학교단의 내분을 통합하고 풍기에서 주요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설법식(設法式)을 거행하여 지도체제를 확립하였다. 이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동학 재건에 노력하였다. 그렇지만 동학농민운동 실패 후 정부로부터 자신에 대한 체포령이 지속되고 동학에 대한 탄압이 수그러들지 않자 세계사정을 살피고 동학교단 재건 구상을 위해 미국 시찰을 계획하였다. 1901년 동생 손병흠, 이용구(李容九)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오사카(大阪)에 머물렀다. 그러나 조선 정부로부터 귀국령과 간신배들의 책동이 잇따르자 그 해에 중국 상하이(上海)로 갔다. 수개월을 머물면서 미국행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이상헌(李祥憲)이란 가명을 사용하며 오사카, 교토(京都), 나라(奈郞), 고베(神戶), 도쿄(東京) 등지에서 이미 망명해 있던 개화파 인사인 박영효(朴泳孝),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조희연(趙羲淵), 이진호(李軫鎬) 등과 교류하면서 근대문명을 체험하였다. 일본 생활 중에도 본국과 연락하면서 교세 확장에 노력하였다. 또한 새로운 근대학문을 배울 수 있도록 두 차례에 걸쳐 교인 자제 중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 교토와 도쿄 유학을 주선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국내의 교도들에게 진보회(進步會)를 조직케 하여 문명개화운동을 주도하였다. 진보회는 대동회(大同會), 중립회(中立會)를 거쳐 1904년 8월 31일 조직되었으며, 회원이 11만 명에 달하는 큰 단체로 발전하였다. 전국에 390여 개의 지회 조직을 비롯해 30여만 명이 검은 옷(黑衣)을 입고 단발(斷髮)을 실천하는 등 근대문명 수용에 앞장서 사회를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진보회가 동학교인들이 조직한 것을 알게 된 정부에서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를 생각해 일본 측과 교섭하여 강력하게 탄압하였다. 이로 인해 태천(泰川)의 고치강, 황주, 함흥 등지에서 많은 동학교인과 회원들이 참살, 익사 당하였다. 정부로부터 진보회가 탄압을 받자, 송병준(宋秉駿) 등이 조직한 친일단체 유신회(維新會)는 일진회(一進會)로 조직을 개편한 후 진보회를 이끌던 이용구를 매수하여 합동일진회를 조직하였다. 이로써 국내에서 흑의단발을 통해 근대문명을 수용하고자 하였던 혁신운동은 실패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학교단은 친일세력이라고 인식되어 함경도 일대에서는 의병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진보회를 조직하고 근대문명 수용을 지휘하면서 언전(言戰), 재전(財戰), 도전(道戰)을 내용으로 하는 『삼전론(三戰論)』을 발표하였으며, 의정대신과 법부대신에게 『비정혁신안(秕政革新案)』을 보내어 정치 개혁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정부의 혁신과 일본과의 동맹을 체결하고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여 전승국의 일원으로 독립국을 유지하려던 구상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또한 근대문명을 수용하려던 갑진개화운동도 이용구의 배반으로 동학교단이 친일세력으로 매도되자 교회분석(敎會分析)을 통해 그동안 유지되었던 교정일치(敎政一致) 대신 교정분리(敎政分離)를 선언하였다. 1905년 12월 1일 『제국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 국내 언론을 통해 그동안 불리던 ‘동학’이 ‘천도교’로 바뀌었음을 널리 알렸으며, 1906년 1월 일본에서 귀국하였다. 2월 16일에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을 공포하고 서울의 다동(茶洞)에 천도교중앙총부를 설치하여 근대적 종교의 틀을 갖추었다. 서울에 천도교중앙총부를 설치한 한 후 지방 조직으로 교구를 설치하였다. 전국을 72개 대구역으로 나누어 대교구를 설치하고, 그 아래 각 지역별로 교구를 두었다. 이외에도 전교규례(傳敎規例), 입교식, 성주문, 치성식 등 종교의례도 근대적으로 정비하였다. 일본에서 귀국할 때 인쇄시설을 들여와 천도교중앙총부 내에 박문사(博文社) 인쇄소를 설치하였으며, 다시 보문관(普文舘)으로 재설립하고 홍병기(洪秉箕)를 사장에 임명하였다. 이어 국내 최초의 대판형 신문인 기관지 『만세보(萬歲報)』를 창간하였으며, 광무학교와 각 신문사에 후원금을 기부하였다. 귀국 후 천도교 조직과 교세 확장에 힘쓰는 한편 친일 배교한 이용구를 설득하였다. 이용구는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진회에 속한 천도교인들을 포섭하여 중상모략하며 해교 행위를 지속하였다. 1906년 9월 17일 가장 신임하여 재정문제까지 맡겼던 이용구와 그 추종세력 1백여 명을 천도교에서 출교시켰다. 이용구는 천도교와 분리하여 시천교(侍天敎)를 설립하였다. 이용구 세력은 그동안 교단 재정권을 거의 위임받아 처리하였기 때문에 교단의 모든 재산이 그들 명의로 되어 있었다. 천도교단으로서는 재정적 타격이 컸고, 당면한 재정난은 해결하기 위해 1907년 4월 성미제(誠米制)의 실시하였다. 성미제는 1911년 4월 조선총독부가 ‘이중과세’라고 하여 기명 성미제를 금지시키자 무기명 성미제로 변경하여 재정난을 해결하였으며, 이는 3 · 1운동 때 운동자금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907년 천도교단 일선에서 물러나고 대도주 직을 김연국(金演局)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김연국이 6개월 만에 이용구의 시천교 대례사(大禮師)로 취임함에 따라 1908년 1월 18일 박인호(朴寅浩)에게 대도주 직을 승계토록 하였다. 일본 생활 중 민족혼을 일깨우고 독립정신을 함양시키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교육임을 깨닫고, 귀국 후 학교를 설립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여러 학교를 후원을 하였다. 당시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를 비롯하여 문창학교(文昌學校), 보창학교(普昌學校), 양영학교(養英學校), 창동학교(昌東學校), 합동소학교(蛤洞小學校), 광명소학교(光明小學校), 석촌동소학교(石村洞小學校) 등 경영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교에 일정액의 후원금을 매달 지원하였다. 그 중에서도 당시 최대의 사립학교였던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를 인수하여 경영하였다. 이 밖에도 지방에는 대구의 교남학교(嶠南學校) · 일신보통학교(日新普通學校), 청주의 종학학교(宗學學校) 등 7, 8개 학교를 직간접적으로 후원 · 설립하였다. 1910년 일제강점 이후 학교와 종교 활동만 가능해지자 천도교단 내에는 비밀결사가 조직되었다. 대표적인 비밀결사는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民族文化守護運動本部)와 천도구국단(天道救國團)이었다.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는 1912년 이종훈, 이종일(李鍾一), 임예환(林禮煥)과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사 직원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천도교 단독으로 하는 것보다는 불교와 연합으로 추진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하여 한용운(韓龍雲), 백용성(白龍城) 등 불교계 인사와 접촉하였다. 그렇지만 한용운은 ‘민생안전’이 우선적이라고 하여 참여할 것을 거절하였다. 이에 천도교 단독으로 민족문화수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1912년 10월 31일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를 결성하고 본부를 보성사에 두었다. 총재에 추대되었으며, 회장 이종일, 부회장 김홍규(金洪奎), 제1분과위원장 권동진(權東鎭), 제2분과위원장 오세창(呉世昌), 제3분과위원장 이종훈 등이 선임되었다. 그밖에 보성사 직원이었던 장효근(張孝根), 신영구(申永求)와 훗날 민족대표로 서명하였던 임예환, 박준승(朴準承) 등이 적극 참여하였다. 1914년 8월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천도교 지도자들은 국제정세 변화에 따라 독립의 기회가 올 것으로 판단하고 비밀결사로 천도구국단을 조직하였다. 명예총재로 추대되었고, 단장 이종일, 부단장 김홍규, 총무 장효근, 섭외 신영구, 행동대장 박영신을 선임하였다. 1915년 7월 천도구국단의 민중운동을 위한 시국선언문 발표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이종일 등이 일본 경찰에 네 차례 소환 당하였다. 조선총독부 당국자를 만나 이와 같은 일을 다시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일이 마무리 지었다. 이 와중에도 포교에 힘쓰고 교당 건립에 진력하는 한편 부구총회(部區總會)를 통해 4월 5일 천일기념일(天日紀念日), 8월 14일 지일기념일(地日紀念日), 12월 24일 인일기념일(人日紀念日), 12월 1일 현도기념일(顯道紀念日) 등 4대 기념일을 정하고 기념행사에는 축연을 베푸는 등 교인들을 위무하였다. 1918년 5월 5일 이종훈, 권동진, 오세창, 최린, 이종일 등 주요 지도자들과 모임을 갖고 향후 민중운동은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의 3대 원칙에 따라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대중화는 각계각층의 민중을 동원하는 것, 일원화는 여러 계층의 독립운동 계획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 비폭력화는 동학농민운동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것으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민중운동의 방법이 정해지자 ‘무오독립시위운동’으로 명명하고, 거사일을 1918년 9월 9일로 정하였다. 이는 이해 8월 초 일본에서 전국적으로 일어난 ‘쌀 소동사건’ 수습에 신경 쓸 때 시위운동을 전개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시위운동 준비로 독립선언서를 이종일과 최남선에게 각각 작성케 하였으나 최종적으로 최남선이 작성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최남선의 독립선언서 미완성, 원로 교섭 지연, 자금 부족 등으로 무오독립시위운동은 뜻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1919년 1월 22일 고종이 승하하자 만세시위를 보다 구체적으로 추진하기로 하고, 실무를 최린과 오세창에게 일임하였다. 앞서 계획하였던 구 관료 접촉, 기독교계와 불교계, 그리고 학생계와의 연합전선 형성이 차례로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 측에서 독립운동 자금 5천 원을 청구하였다는 말을 전해 듣고 흔쾌히 수용하여 기독교 대표 이승훈에게 전달케 하였다.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연합전선으로 3 · 1운동 준비가 무르익던 1919년 2월 20일 권동진 집에서 민족대표는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 불교 2인 등 33명으로 결정하였다. 천도교는 2월 20일부터 26일까지 1주일 동안 민족대표로 손병희를 비롯하여 이종훈, 홍병기, 권동진, 오세창, 최린, 박준승, 이종일, 김완규, 홍기조, 나용환, 나인협, 임예환, 양한묵, 권병덕 등 15명을 선정하였다. 1919년 2월 27일 밤 천도교 직영 보성사에서 독립선언문 2만 1천매를 인쇄하였다. 독립선언서 인쇄과정에서 종로경찰서 고등계형사 신승희에 발각되어 이종일이 보고하자 거금 5천 원을 매수 자금으로 주어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2월 28일 가회동 손병희 집에 민족대표 23명이 모여 다음날 거사를 재확인하고 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번에 우리 거사는 조선의 신성한 유업을 계승하고 아래로 자손만대의 복락을 작흥하는 민족적 과업이다. 이 성스러운 과업은 제현의 충의에 의지하여 반드시 성취될 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하여, 3 · 1운동이 성공적으로 전개될 수 있도록 당부하였다. 그리고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할 경우 불상사가 일어날 우려가 있다고 보고, 탑골공원 부근 태화관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 기념식을 거행한 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경무총감부의 신문을 받고 검찰로 송치되어 며칠을 보낸 후 서대문형무소 52호 감방에 수감되었다. 신문과정에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였으며 기회만 있으면 독립운동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재판 과정에서 중병으로 보석을 신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더 이상 치료가 어려운 상태에 이르자 1920년 10월 20일 병보석으로 풀려나 동대문 밖 상춘원(常春園)에 기거하면서 치료하였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출판법』, 『보안법』, 『형법』 위반으로 징역 3년(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산입)을 받았다. 병세가 약간 호전되었으나 결국 1922년 5월 19일 만 61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천도교회장으로 영결식을 갖고 서울 우이동에 안장되었다. 저서로는 『수수명실록(授受明實錄)』, 『도결(道訣)』, 『명리전(明理傳)』, 『천도태원설(天道太元說)』, 『각세진경(覺世眞經)』, 『대종정의설(大宗正義說)』, 『교(敎)의 신인시대(神人時代)』, 『무체법경(無體法經)』, 『성심신삼단(性心身三端)』, 『신통고(神通考)』, 『견성해(見性解)』, 『삼성과(三性科)』, 『삼심관(三心觀)』, 『극락설(極樂說)』, 『성범설(聖凡說)』, 『진심불염(眞心不染)』, 『후경(後經)』, 『십삼관법(十三觀法)』, 『몽중문답가(夢中問答歌)』, 『무하사(無何辭)』, 『권도문(勸道文)』, 『삼전론』 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피고 등에 대한 본건을 관할위로한다(담당할수없음) 경성지방법원 1919-08-01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내란 경성지방법원을 본건의 관할재판소로 지정 고등법원 1920-03-22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소요 본건 공소를 수리하지 않음 경성지방법원 1920-08-09 국가기록원
4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소요 징역 3년(원판결 취소), 공소불수리(公訴不受理) 신청은 각하(却下)함, 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에 산입 경성복심법원 1920-10-30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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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합동묘역 서울 수유 국가관리묘역 서울특별시 강북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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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선언 기념탑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2 기타 봉황각 서울특별시 강북구
3 사적지 손병희 집 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4 장소 3·1공원 충청북도 청주시
5 비석 황극단 전라북도 전주시
6 기념관 의암 손병희선생 유허지(의암기념관) 충청북도 청주시
7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8 동상 의암 손병희선생 동상 서울특별시 종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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