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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690
성명
한자 金應守
이명 金壽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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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5 훈격 대통령표창
1919. 3. 11 부산(釜山)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 고등과 학생으로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에서 일어난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피체(被逮)되어 부산지방법원(釜山地方法院)에서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5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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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경남 통영(統營) 사람이다.

그는 부산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 고등과에 재학 중 1919년 3월 11일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서울의 3·1운동 소식이 부산에 전달된 것은 3·1운동 다음날인 3월 2일경으로 이 때 기독교 인사들에 의해 독립선언서가 비밀리에 배포되었다. 이에 따라 부산내 각급 학교에서는 만세시위를 준비해 갔는데, 김응수는 일신여학교 교사 주경애(朱敬愛)·박시연(朴時淵)을 비롯한 송명진(宋明進)·김순이(金順伊)·김난출(金蘭出)·박정수(朴貞守)·김반수(金班守) 등 일신여학교 기숙사 학우 10여 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다. 이 때 이들은 부산상업학교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3월 11일 밤을 기해 거사하기로 뜻을 모으고, 3월 10일 저녁에는 기숙사 벽장속에 숨어서 밤을 세워 태극기 50여 매를 만들었다.

그리고 거사일인 3월 11일에는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온 뒤 오후 9시를 기해 교사 주경애·박시연 등과 함께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한 뒤 시내로 나아가 좌천동(佐川洞) 등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 그는 시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면서 시위행렬의 선봉에 섰다가 이를 탄압하는 일경에 붙잡혔다.

붙잡힌 후 그는 일경으로부터 뺨을 맞고 구두발로 차이는 등 모진 수모를 당하면서도 "세살 먹은 아이도 제밥을 빼앗으면 달라고 운다. 우리들이 우리나라를 돌려 달라고 운동하는데 무엇이 나쁘냐?"면서 당당하게 독립에 대한 의지를 천명하는 민족적 기개를 잃지 않았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3월 12일 붙잡혀, 4월 2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가출옥증표(부산감옥, 1919. 8. 17)
  • 범죄인명부
  • 감사장(대한민국국제승인경축통영시민대회, 1948)
  • 부산·경남 3·1운동사(3·1동지회, 1979) 40∼42·102·103면
  • 부산일신여학교 만세운동기념비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179∼181면
  • 국제신문(1972. 3. 1, 1979. 2. 28)
  • 명적표
  • 가출옥자여권(통영경찰서장, 1919. 9. 13)
  • 표창장(통영읍장, 1953)
  • 부산시사(부산시사편찬위원회, 1974) 제1권 1002∼1004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응수 김수(金壽) 경상남도 통영(統營) 부산 만세시위
본문
1901년 1월 21일 경상남도 통영군(統營郡) 통영면(統營面) 대화정(大和町, 현 통영시 중앙동)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수(金壽)를 사용하였다. 1919년 부산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 고등과에 재학 중이던 당시 부산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서울에서 만세시위가 거행되고 이 소식이 지방 각지로 전파되면서, 부산에서는 1919년 3월 2일 학생대표와 기독교 인사들을 통해 서울의 독립선언서를 전달받고, 비밀리에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1919년 3월 10일 새벽 부산진(釜山鎭) 일신여학교 기숙사 주변에 살포된 독립선언서 격문 전단을 발견하고 같은 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주경애(朱敬愛)에게 보여주면서 “지금이 전 조선인이 결집하여 독립을 쟁취할 절호의 기회로 교사와 학생을 조직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거행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주경애는 박시연(朴時淵)을 비롯한 동료 교사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학교 차원의 만세시위 결행에 대한 동참을 이끌어 낸 뒤, 학생 대표들에게 이 소식을 알려 학생 규합을 도모하였다.이때 부산 지역 학생을 조직화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우선 같은 학교 고등과 4학년 김반수(金班守)·심순의(沈順義)·김복선(金福善)·김봉애(金奉愛), 고등과 2학년 김신복(金新福), 고등과 1학년 이명시(李明施)·송명진(宋明進), 학년 미상 김순이(金順伊)·박정수(朴貞守) 등 학년별 대표에게 거사 계획을 알려주고 동지로 규합한 뒤 학생 동원과 거사 준비 책임을 분담해주었다. 더불어 부산 제2상업학교(구 부산상업고등학교, 현 개성고등학교)에 연락하여 연합시위를 전개할 것을 제의하였다. 거사 전날인 3월 10일 저녁에는 수업을 마친 뒤 기숙사로 돌아와 고등과 학생 11명과 함께 치마를 탈색해 태극기 50여 개를 제작하였다.거사일인 3월 11일이 되자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에 집결한 학생들은 오후 9시를 기해 교사 주경애·박시연 등과 함께 교내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이어 시내로 진출하여 좌천동(佐川洞) 등지에서 주민에게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앞장서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주민 수백 명이 시위대에 합류하였고, 그들은 부산 시내를 행진하였다. 시위 행렬의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던 중 해산을 위해 출동한 일제 군경에게 붙잡혔다.1919년 4월 2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월을 받았다.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가석방되었다.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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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부산광역시 기장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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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장소 부산진일신여학교 3.1운동 만세시위지 부산광역시 동구
2 부산 3·1독립운동 기념탑 부산광역시 동래구
3 비석 부산 일신여학교 만세운동 기념비 부산광역시 금정구
4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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